[묵상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전봉석 2022. 11. 5. 04:47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2:20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느헤미야는 기도하였다. 그리고 왕 앞에 고하기 전에 묵도하고 말하였다. ‘어떤 일’을 두고 우리는 기도가 없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왕이 관심을 두게 하심도, 그의 일을 듣고자 하는 마음도, 그의 본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그 마음의 관심을 주장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라는 것, 이를 오늘 시인 솔로몬의 표현으로 하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그렇게 느헤미야는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이 훼파된 것을 목격한다. 저의 마음의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술르월, 11-12월에 기도하였고 니산월, 3-4월에 느헤미야는 귀국을 왕께 말하고 이를 행하게 된다. 기도하고 실행되는 과정에 있어 4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의로운 근심을 하는 사람들이다. 누구의 일을 두고 마음이 쓰인다. 아이는 좀 어떠한가, 하고 저가 쓰는 글을 늘 들여다본다.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까닭도 그러한 마음쓰임이 저절로 우러나서였다. 우리로 근심하지 말라, 하신 것은 세상 일을 두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한데 우리의 느헤미야와 같은 수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개인적인 안위와 삶의 피로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일로 근심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17:22).”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두고 한 영혼을 또는 교회를, 진리를 위한 수심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도 움직인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느헤미야는 기도하였고, 왕의 물음 앞에서도 묵도한 후에 말하였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기도하게 한다. 세상으로 하는 근심은 혈기와 방자와 오만과 아집을 드러낸다. 그러나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누구로 마음이 쓰였다. 서운하였는가, 제가 가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하고 말 중에 저의 생각이 나왔다. 솔직히 그들 사는 일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이고 어찌 되었나, 하고 궁금하다. 해서 문자로 물었더니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상황이 가관이다. 나는 저를 될 수 있으면 다음 주부터 다시 오라 하였다. 그대로 두기에는 덩달아서 휘둘리고 있는 것이라, 듣고 권하며 이를 함께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아이가 하루 쉰다 하여 점심 때 불러 밥을 같이 먹었다. … 이처럼 신경이 쓰이는 일에 있어 ‘괜히’ 그 마음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내 안에 신경 쓰이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지, 어느 것이 세상을 향한 마음인지를 알아야 한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여기서 그 구분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주께 아뢴다. 이어 자기 일이 아닌 일을 두고 소위 ‘남의 일’을 말하게 된다. 제가 가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하는 누구의 칭얼거림이 실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이란 것을 인정한다. 다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누구 일로 마음 쓰고 신경 쓰여서, 한가하게 관여하려 하겠나?

 

한데 예수님의 놀라우신 반박의 말씀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아니 어째서 우리가 애통하는데 세상이 기뻐할까? 어떻게 우리가 근심하는데 도리어 근심이 기쁨이 될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근심은 그러하다.

 

가령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니엘 기도회’는 잘 나가고 있나? 하고 물었다. 이번 주간은 퇴원 후 쉬는 기간이라 그럴 수 있으나 다음 주부터 출근하면 어찌될지… 하여 나는 저에게 한 번 이번 20일은 작정하고 한 날도 빠짐없이 참석해보라고 권하였다. 굳이 그럴 거까지야, 하고 친구는 의아해했다. 기도할 게 얼마나 많은가? 하고 되물었다. 전화 저편에서 뭐 그다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저의 상태가 어찌 시급한지 눈대중으로 꼽아보았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신을 두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안 믿는 큰 아들의 영혼을 두고 기도하라고… 회사에서 겪어야 하는 ‘하던 대로’의 일처리 가운데 하나님이 싫어하실 일을 두고 기도하라고… 친구는 어느 것은 동조하고 하고 어느 것은 끝까지 ‘그럴 수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하였다.

 

끝으로 우리가 이와 같은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는 것을 상기시키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와 같은 근심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그랬을 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이 기쁨이 얼마나 희한한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그럼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나는 누구의 지금 난감한 처지가 마음이 쓰인다. 마음이 쓰여 자주 생각한다. 생각하다 때론 생각하기 싫어서도 외면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듯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다. 느헤미야도 그러하였다. 술관장으로 저는 강국의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로는 그만하면 됐다. 근심할 게 없다. 그런데 신경이 쓰인다. 하나님의 전이 훼파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고국의 사람들이 안일하고 해이한 가운데 있는 소식에 마음이 걸린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구 일에 내가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다. 저들을 살라 마라 할 수도 없다. 그저 그 사연에 쯧쯧 혀를 차고 말면 그만일 텐데…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그러니 내 속이 볶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한다. 곧 여기서 <하나님의 기쁨 다섯 가지>를 묵상할 수 있다. 이를 예레미야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41).” 이를 근거로 삼아서 생각하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 때 기뻐하신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우리가 언약을 붙든다는 것은 주의 선한 일에 온전하여진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다 주신다고 하신 스스로의 약속을 이행하시면서 기뻐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우릴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바울은 꿰뚫었다. 그래서 우리의 이런저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이 모든 게 합력 중이다. 우리의 선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우리 마음에 두신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로써 예수를 믿게 하심을 하나님의 일로 흡족해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넷째,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곧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0-31).” 곧 내가 주를 바라며 주를 의지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알기 때문이듯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그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이를 시인은,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80:15).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104:16).

 

곧 오늘 우리는 주가 심으신 영광이라는 나무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나는 누구로 인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프고, 어떡하나? 하고 마음을 졸일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을 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저를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말로나 어떤 방도로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찍, 하고 뭐라 판단하고 말 일이 아니다. 그리 두고는 잊히질 않는다.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민 24:6).”

 

안 오니까 좋고, 그의 일에 신경 안 쓰니까 편할 줄 아는데, 하나님이 두시는 마음은 나를 들들 볶는다. 누구나 그의 안에 어떤 노여움, 상처를 안고 산다. 딱히 누구 일을 두고 하려는 말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 아니 그런 사람이 없단 소릴 하려는 것이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떤 이가 다 죽어가는 엄마를 붙들고 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면 한 번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냐고 원망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안고 사는 노여움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다. 자꾸 찌른다. 성경은 엄연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하물며 목사로 살든지 목수로 살든지, 이러한 문제는 저절로 낫지 않는다. 그것으로 주를 찬송하든지 원망하든지… 나는 누구에게도 그리 일러 이 또한 주께 맡기지 않는 이상 자신이 안고 살아야 하는 송곳일 것이다.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오늘 시편은 솔로몬의 노래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이 한 행에 모든 인생사가 담겨 있는 듯하다. 곧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은 고스란히 자신이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마치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천성을 향해 가면서도 등짐 가득 지고 가는 여러 근심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어쩌겠나? 내리 그리 끙끙거리며 가는 수밖에. 도대체 저는 십자가 앞을 통과하였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친구가 여전히 자신의 확신 없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 대해 나는 네가 죽을병에 걸린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고 엄포를 놓았다. 안 믿는 가족을 두고 그러려니 하고 산다는 것은 저가 어떤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일보다 끔찍한 것이다. 아내와 장모를 앞에 두고 안 믿는 손자가 지금 사경을 헤맨다면 어떻겠나? 하고 물었다. 이 말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와 닿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는 누구에게 그 친정 부모가 교회 잘 다니시다 안 믿겠다 하고 그만 두신 일에 대해 지금 저들이 병치레를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짧은 한 구절의 말씀도 그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할 때, 홀연히 죽음이 와서 데려감으로 회개하고 주를 영접할 기회조차 더는 없어지는 그 순간에 대해… 영혼이 갈린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에 대하여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7).” 이것이 엄청난 복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전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여 나 또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는 고백을 내 것으로 붙들고 산다. 이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내 명의의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산들, 남부럽지 않게 누리고 산들… 그 마음에 여러 개의 송곳이 있어 이를 대리만족으로 여기며 떵떵거리고 산다한들,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3-24).” 나는 이게 더 행복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누군 가족들마다 자기 명의의 아파트 한 채씩을 가지고, 심지어 어디 건물을 소유하고 산다. 한데 이를 유지하고 지탱하느라 이자에 원금에 또 다시 대출에 안절부절 부자거지로 산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사는 것을 보면 나는 왜 저러고 사나싶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이를,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

 

나는 이 말씀에 흡족하다. 팔자 좋다, 뱃속 좋다, 하고 누가 비아냥거린다 해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우리의 만족은 세상으로의 것이 아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그러니 수억만금을 가지고 살다 죽었다 한들! 솔로몬의 회환이 깊은 이유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33:16-17).

 

이를 한사코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더는 뭐라 한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3-5).

 

시인 솔로몬은 왕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도 마치 회의주의자 같이 되었다. 돌아보니 아쉬운 게 가장 많을 사람은 소유하고 산 게 많은 이이다. 오늘 우리로 더하시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기쁨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또박또박 예레미야의 증언을 소리내어 읽어보시기를,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