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말씀을 보내사

전봉석 2024. 3. 7. 04:17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8

 

 

꾸준하여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 복이 있다. 법은 살았을 때나 적용되고 죽은 후에는 필요치 않다. 율법에 얽매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는 나의 자아가 살았기 때문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면 더는 법의 굴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오늘 바울은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묻는다(1). 곧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율법으로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나로서 그 법을 다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이다. 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아직도 술을 마셔도 되네 마네 하는 것으로 논쟁하는 일은 가소롭다. 그것은 자기 생각으로 스스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유로운 줄 아나 자유롭지 못한 것이고, 옳다고 여기지만 옳은 길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다. 마치 어린아이 적의 일을 두고 여전히 해도 되네 마네 시비하는 것처럼 우습다. 다만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그것으로 죄다. 그 정도야, 하고 스스로를 허용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것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마치 여전히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어야 안심한다는 어른아이처럼.

 

우리는 영적으로 더 이상 매인 몸이 아니다. 무엇으로도 자유로우나 무엇으로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곧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그러므로 더는 죄에 매인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산다는 것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그러므로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그럼에도 우리로는 어려운 것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즉 육을 입고 사는 동안의 일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 나의 허물과 연약함을 시인함으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그 이유와 원인을 알았다.

 

마음의 굳은 결심으로는 나를 자라게 할 수 없다. 나의 의지나 판단으로는 선을 이룰 수도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무던함으로 가능하나 주를 인정함으로 가능하였다. 잠깐의 열심으로가 아니라 늘 그 가운데서 주어진 삶을 다하는 일. 그것을 위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와 같은 두려움이 우리로 살게 한다. 누가 잠에 대하여 스스로 무방비하여 졸리면 자는 터라, 하루가 늘 나른하다. 그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할 때 굳이 그러고 있는 자신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다. 물론 우울증과 함께 그 마음의 병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누구는 여전히 안 믿던 시절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안 믿는 사람들과 즐기던 것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하지 않는다. 이를 옳지 않다하니까 듣기 싫은지 전에 같지 않다. 또한 누구는 결국 자신을 못미더워하면서 자신의 고집대로 행한다. 희한한 것은 이 모든 일에 행여 뭐라 말하면 불편해진다.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면 방관자가 되고 뭐라 말하려면 껄끄러워진다. 물론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결코 내가 저들보다 나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 역시 별 수 없어서, 그러니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바랄 뿐 나로서도 내 자신을 어쩔 수 없어하면서 그리 밝히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기준은 말씀으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내 안의 주의 영이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주 대립하는 나의 옛사람과 다툼이 있어서이다.

 

하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를 앎으로 오늘도 정해진 시간과 동선을 따라 주 앞에 나왔다. 그리하여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말씀이 살아 있는 삶, 오늘 시인은 우리의 특별한 사랑을 일깨운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 147:18-20).

 

늘 내가 느끼고 누리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사랑을 행하시지 아니하셨을 사랑으로 나를 붙드신다. 이때에 ‘율법이 그럼 죄냐?’ 하고 오늘 바울은 역설적으로 묻는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하고 말한 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

 

우린 결코 형식주의자도 율법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러므로 이것에서 유익을 얻는다. 곧 나는 때로 습관을 따라 이 시간을 가진다. 때론 왜 이러고 있나 싶을 정도로 무의미한 것 같을 때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나 저의 일에 마음을 쓰는 일에서도 내가 왜 꼭 이렇게까지 저를 의식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리 되는 것을 두고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데서 답을 찾았다. 곧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곧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으로였고 이에 주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데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된다. 때론 참 짜증나고 성가신 일이다. 누가 온다 하여 다른 시간을 뺐는데 아무렇지 않게 다음에 오기로 연락이 왔다. 같이 어떤 시간을 낼 때 나는 늘 그 시간을 앞두고 기다리며 준비하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 시간을 잊고 지나가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일일이 확인하고 이유를 물을 수도 없고… 그렇게 또 두면 그냥 늘 그래도 되는 것처럼 군다. 사람과 사람 사에서 법이 유용한 까닭은 그 때문인가? 결국은 그에 따른 법이 없이는 서로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9-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게 아니라면 어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결코 우린 우리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예전의 것으로 주를 따를 수 없다. 여전히 안 믿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없고 진리가 아닌 곳에서도 마음의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이와 같은 말씀에 의문이 드는 경우와 안도하는 경우가 있겠다. 의문이 드는 경우는 여전히 자기 판단과 기준을 꺾지 못해 버릴 수 없어서 그리 따르며 허용하려는 것이다. 안도하는 것은 더 이상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주를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일이다. 이에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계명과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나는 죽고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은 산다. 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

 

옳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으로는 나를 죽일 뿐이다. 여전히 말씀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13).” 곧 내가 죽어야 비로소 내가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오늘의 현실을 산다. 살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 죽음으로 산다. 이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8-19).” 내 안에 적이 있다. 늘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 자신이다. 여전하여 버릴 수 없는 죄의 문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0-21).”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나를 들고 주 앞에 간다. 어떻게든 놓여나고 싶은 나의 아집과 교만으로 인해 절규하며 말씀 앞에 선다. 이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오늘 이와 같은 바울의 절규가 나와 같다는 데서 또한 안심한다. 나의 갈등과 내 안의 어려움을 두고 기뻐한다. 이로써 내 안에 주의 영이 싸우시는 것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나는 할 수 없어서, 그리하여 주의 은혜만이 필요하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에,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나 같은 죄인을 어찌 그리 사랑하시는지. 나는 누구를 사랑할 수 없어서 그것이 못내 싫기도 하여 몸부림치기도 하지만 주가 내 곁에 두시는 바, 속을 끓이고 애를 태우다 안정제를 먹어가면서도 주의 사랑을 따라 살기를 바람이었으니,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2-3).

 

이에,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6, 10-11).

 

내가 오늘도 주를 바람이여,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5, 18).

 

이는,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