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전봉석 2025. 3. 15. 04:36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27-28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1-2

 

 

에브라임 산지 실로에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聖地)인 여호와의 성막이 있었다.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를 지나 곧 도래할 사무엘 시대 초기에까지 이곳은 이스라엘에 있어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분배받은 곳이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5).”

 

그러나 에브라임 산지에는 에브라임 지파만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 남쪽은 베냐민 지파가 있었다.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수 18:11).” 라마다임소빔은 숩 족속의 두 언덕으로 ‘숩 땅에 있는 고지들’이라 하였다. 사무엘 가문의 조상이던 숩 혹은 소배가 그곳에 정착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엘가나로 말하면 그의 자손은 이러하니 그의 아들은 소배요 그의 아들은 나핫이요(대상 6:26).”

 

아마도 두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듯한 이 라마다임소빔은 에브라임 산지 중 베냐민 지파가 거주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라마와 같은 지역으로,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으로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다. 후일에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이고, 사무엘 시대에 주요한 위치로 여러 라마 지역 가운데 ‘라마다임소빔’이란 원 지명을 그대로 표기한 것 같다.

 

라마란 ‘언덕 마을’로 이 지역은 후일에 신약 시대에 와서 부자 요셉의 고향과 동일한 ‘아리마대’로도 불렸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오늘 거기에서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가 등장한다. 사무엘의 부친이다. 에가나는 레위 지파로, 그를 ‘에브라임 사람’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는 타 지파처럼 일정한 기업을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그런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

 

당시 레위인으로 경건했을 엘가나가 중혼(重婚)의 관습에 물들었다는 사실은 사사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해이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성경은 항상 아내를 여럿 둠으로 부득이하게 야기될 수 있는 경우를 경계하였다. 그와 같이 두 아내 가운데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다. 브닌나는 진주, 보석, 산호 등의 뜻이다. 브닌나가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나’는 무자하였다. 한나는 ‘사랑스러움’ 또는 ‘은혜스러움’이란 의미를 가졌다. 히브리 사회에서 흔한 이름으로 여기서 한나는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8).” 더욱이 두 아내를 두고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하고 오늘 본문은 이른다(4-5).

 

그런 가운데 우리의 고통은 언제나 우리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6).” 이때의 고통으로 한나가 주께 향하였음으로 후일에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21).”

 

결국 오늘 우리의 어떤 고통은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초석이 된다. 그것이 각자의 슬픔과 고통이겠으나 언제나 우리의 길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하나님이 어찌 다루시는지, 주의 섭리를 바라며 기다리는 마음이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며 더욱 더 주께로 친밀하게 한다.

 

동생은 필리핀 사역으로 십 수 년을 지내다 어처구니없는 아이 사건으로 발이 묶이면서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촉법소년법은 너무 지나치다. 아이와 스치기만 해도 아이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되어 교사나 스승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위축되었다. 중고등부 때는 모든 게 다 점수로 통제되면서 아이들의 영혼을 점점 더 강퍅해지게 한다. 이를 또 교묘하게 악의적으로 습득하는 아이와 부모들도 많다. 어쨌든 아이의 작은 거짓말이 부풀려져서, 2년 남짓 필리핀에서 양육하던 아이와 그 엄마의 억지주장으로 발목이 잡힌 셈이다.

 

1심에서는 징역 1년 반이 선고되었고, 서로가 항소하여 2심을 기다리던 것이 얼추 1년이 다 돼 간다. 저쪽에서 합의에 응하면서 지루한 재판을 끝내려고 하는데, 들어보니 그 사정이 딱하게 됐다. 동생으로서는 그 일로 신경 쓰다 폐결핵이 왔고 약물치료부작용으로 그런지 신장이 안 좋아져서 여전히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더러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억울함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 덩달아서 악다구니를 쓰며 상대와 대적할 수 없으니 그 또한 속 터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할 것은 주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조용한 호흡 같다. 다만 주께 아뢰고 주의 선하심을 바랄 뿐이라, 어찌 되었나? 하고 물으면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답뿐이다.

 

그런 가운데 저쪽 친정엄마가 어디 요양원에 있었는데, 무슨 일로 소동이 벌어지고 그 일로 요양원 측과 서로 또 맞고소가 붙은 모양이다. 거기다 같이 동거하며 죽고 못 살 것 같던 사람과 갈라서면서 무슨 사업에 투자를 했는지 어쨌는지, 서로 돈을 돌려받겠다고 뒤엉겨 싸우는 모양이다. 거기다 해외 어디로 내보냈던 아이가 잠시 돌아왔는데 도로 보낼 돈이 없어서 도로아미타불이 된 상태이고… 상대의 그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니 급한 대로 빨리 합의를 해서 얼마라도 받을 생각인데, 이게 또 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금액도 정해진 터라… 영국의 희극작가이며 배우였던 버나드 쇼가 그의 생을 희극처럼 살다 그의 묘비명에다도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썼던 것처럼, 그런 형국이 이다.

 

오늘은 한나가 운다. 서러움과 탄식으로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주께 기도할 뿐,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0-11).” 이게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당시 제사장이었던 이가 이를 보고 술에 취한 줄 알았다.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14).” 한나는 그만큼 간절하였고, 엘리는 그만큼 덕이 없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15-16).”

 

오늘은 우리가 울며 주 앞에 엎드려 아뢸 뿐인 듯하나, 후일에 웃음지을 수 있는 것은 주의 자녀들뿐이다. 얼마 후 한나의 찬송이 이를 증거한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2:9-10).”

 

어릴 적부터 나는 나의 부친의 사역 현장에서 이를 자주 목도하였고, 오늘에 이르러 형제들의 사역에서도 이는 고스란히 입증되고 있는 것이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그렇듯 저들은 기고만장하여 스물 몇 가지 거짓 주장으로 사람을 옭아매었지만 정작 자유로운 쪽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안하나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 여기 한나도 기도 후에는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18).” 주께 맡김은 신통한 노릇이라, 나의 주장이나 의지를 주께 양도하고나면 모든 게 평안해진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주께 맡기고 아룀으로 더는 우리가 안달할 게 없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 우리 편이 확실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에게 ‘선은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선은 아니다.’ 더러는 염려와 근심으로 건강이 상하고, 마음은 어려워서 쩔쩔매는 게 당연하여 죽을 것 같아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하는 말씀이 전에는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가장 든든하게 나를 붙잡으신다.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면, 잘하든 못하든, 실패하든 성공하든 모든 게 다 ‘주의 것’이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이후 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나치게’ 잘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다만 이 하찮은 일이나 나의 이 하찮음으로 묵상글쓰기와 주어진 한 날을 살아내는 일이다. 나의 의지나 주장은 사소한 일이나 이를 주께 맡김으로 양도하였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런 가운데 우리의 삶이란 항상 역설적이라, 안달복달하던 일이 주께 맡김으로 평안해진다. 통화할 때마다 어떻게 됐냐? 하고 물으면 동생은 늘 남의 일 말하듯 몰라, 나도! 하고 시큰둥하여서 오히려 묻는 내가 무안할 정도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어떤 불안이 엄습할 때, 또는 어떤 고통으로 일그러진 영혼이 되어 끙끙거리다가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는 말씀을 읊조리며, 속된 말로 ‘될 대로 되라’ 하고 주만 바란다(롬 14:8). 이것이 경건한 마음인지, 불온한 마음인지, 나는 이제 무책임할 정도로 주가 알아서 하시기를 맡겨 바랄 뿐이다.

 

이 시간 주 앞에 올라와 한나의 심정을 헤아리다 그 슬픔이 저로 기도하게 하였고, 비록 제사장 엘리도 분별하지 못하고 술에 취한 줄 알았으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대답할 때에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7-18).” 이는 엘리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주의 선하심은 우리가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선명해진다. 그때의 주의 선하심은 나의 모든 것에 미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은 모든 것이나, 나의 모든 게 선은 아니다.’ 하는 역설을 가끔 되뇌며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주 앞에 올라와 말씀 앞에 나를 앉히고,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시 61:1).

 

주께 아뢸 뿐,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2-3).

 

그러므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4).

 

그럴 때에 나는 하찮고 보잘것없이 부족할 뿐이지만,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이렇게 오늘도,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