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잠언 10:16-1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편 67:1-2
날이 추워지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다. 알람이 울리고 한참을 더 꼼지락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겨울이 다가왔다. 미국 대선에서 설마, 했던 이가 당선이 되었다. 어떤 사람인데? 하고 아내가 물어 나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철들지 않은 노인.’ 돌발적이고 저돌적인, 이 시대가 호응하는 코드다. 걸러내지 않은 말들이 난무하고, 풍자라는 장르에서 모든 사안을 희화화 한다.
우스갯소리, 가벼운 농담, 단회적인 그리고 즉흥적인, 결코 무겁지 않은, 물리적으로 성장을 멈춘, 오스카(퀸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의 시대. 또는 자발적으로 어른이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의 시대. 눈에 띄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말 한 마디, 옷차림 하나, 표정에 이르기까지 본질과 상관없는 것을 패러디함으로 웃고 말자는 것이다. 진중함은 예전에 엿 바꿔 먹은 꼴이다. 적당한 위트와 센스가 사람들의 주위를 끈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고리타분한 뒷방늙은이 취급을 한다.
이러한 때에 ‘의인의 수고’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훈계를 지키는 자’로 생명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를 뿐이다. 저들의 그와 같은 성공은 언제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시 73:2). 고로 징계를 버리면 그릇 행한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잠 10:16-17).” 부자로 살면서 ‘자기 멋대로의 신앙’에 도취되지 않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징계는 고로 주를 바라는 간절함을 더한다.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는 것을 두고보지 않으신다. 그러느니 우리를 판단하시고 징계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의 어려움이 내일을 대비한다.
보면 다들 왜 저러는가 싶게 부요하다. 신발을 수 천 켤레 모으고, 명품 가방을 기분에 따라 바꿔 들면서, 철마다 가구를 바꾸고, 그런 것으로 위로를 삼는다. 건강을 숭배함으로 몸에 좋다면 걸신들린 것처럼 챙기고, 가족이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두둔하려 드는,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에서 내남없이 돈돈거리며 산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어떻게 그러고 살아? 하면서 스스로를 풀어둔다. 다 그렇지 뭐, 누군 안 그렇겠어? 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관대하다. 스스로를 예외로 두는 이상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죄에 대한 경각심은 ‘좋은 게 좋은’ 정도에서 타협하게 될 뿐이다. 부자는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어렵다고 하셨구나. 유난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사건에 연류 되어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신자임을 자처한다.
건강을 돌보는 일이 주의 성전을 건사하는 일이겠으나 그 자체로 우상이 되기 쉽다. 한 끼에 수십만 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식탁 앞에서 과연 어떤 기도를 드리면 좋을까? 건강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송마다 ‘먹방’이 인기고, ‘맛집’을 선호하고, ‘건강밥상’에 관심이 많다. 몸의 숭배는 더욱 가관이다. 몇 키로 감량에서 ‘몸짱’으로의 변신을 높이 쳐주는 시대다. 인친척의 비리가 끊이지 않고 학연지연관계가 얽히고설켜 똬리를 튼 뱀 같다.
어쩌면 우린 받아들이는 것에 병적으로 대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면서 스스로 무장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막연한 구호가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이에 성경의 원리는 슬플 때 기도하고 기쁠 때 찬송하라는 것이지, 이를 개선하라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고결함의 경지에 도취된 시대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저보다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자기만족에 겨워 자긍함으로 족한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누구는 ‘거짓 제자로 드러나느니 갸롯 유다처럼 목메어 죽는 게 낫다’고 하였다. 행여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렵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중심을 바로 잡고 산다는 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 것도 가치 없다. 저녁예배로 요즘 읽고 있는 열왕기상에서의 솔로몬이 안타까웠다. 수많은 처첩을 두고 저들을 위하여 산당을 짓고, 부에 겨워 악을 도모하며 넘치는 지혜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는 오늘 말한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하면 왜 근심이 오는지를 알아야 했다.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14).” 돌이켜 후회와 한탄으로 고백한다.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29).” 말 그대로 가장 많은 것을 누려보았을 그의 첫 마디는 간결하였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결국은 은혜가 아니고는 감당할 수가 없다. 일찍이 다윗은 이르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와글거리며 한때는 천하를 호령하며 어깨에 힘주고 살았을 저들이 굴비 엮이듯 줄줄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이 두렵기도 하다. 내가 누구를 나무랄까? 나는 기도하기를 아침에 묵상을 쓸 때만큼만 하루를 살게 해주세요, 한다. 어쩌면 그리도 ‘내 안에 내가 많은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결코 유혹을 없애주시지 않는다.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가장 선호하고 바라는지를 알게 하신다. 무얼 붙들고 살고 있는지, 무엇으로 연연해하며 끌려가고 있는지. 유혹은 항상 기질에 따라 온다. 선호하는 것으로 오고, 놓지 않으려는 것을 노린다. 경험이 많은 게 좋다고들 하지만 그만큼 유혹을 당할 범위도 넓어지는 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암울하다가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서 더욱 위로가 크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가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실 것은 분명하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를 고이 품어주시는 주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저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세상이 안타까울 정도로 작다. 저마다의 이상과 꿈이 보잘것없이 하찮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들의 허망함에 대하여.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왜 바울은 거룩한 자로 더욱 주 앞에서 온전하여져 가면서도 자신의 옛 모습을 잊지 않았을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주의 은혜를 확신할수록 예전의 것을 돌아보며 주 앞에 감사를 잃지 않으려 했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관없던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빛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흩어진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 아, 왜 점점 죄가 드러나는지 알겠다.
최선으로 주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필연적으로 나는 나의 악함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나의 자백은 유효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반대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죄를 마주하고 대면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경이롭기도 한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그러므로 사나죽으나 이제는 내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에 안도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의 한 날이 주 앞에 그러하기를, 그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 6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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