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잠언 11: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있을 때 그 있는 것으로 삼가지 아니하면 부끄러움이 온다. ‘돼지 코의 금 고리’라니! 실제 자신만 알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너무 많다. 도시 한복판에서 굿판을 벌이는 장관과 다들 외치는 소리가 저에게만 들리지 않는 검사출신의 수석과 전 세계가 우려를 금하지 못하나 그저 본인의 신념에 우뚝 선 어느 강대국의 대통령 당선인과 이것들을 서로 조롱하고 희화하는 사람들과… 마치 세상은 모두 저마다의 ‘돼지 코에 금 고리’를 자부하는 것 같다.
양심이 작동을 멈춘 것 같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말 그대로 요지경인 세상이다.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막 13:7).” 성경은 일깨우신다. 거짓은 본래 진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극구 피한다. 양심은 괴롭기 때문에 작동을 멈춘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은폐와 왜곡과 서로에게 떠넘기는 책임회피인 것을.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넘쳐나는 거짓과 옹호와 비양심적인 자기주장에 겨워 세상은 연일 시끄럽다.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나무 뒤에 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요즘은 매순간이 터져 나오는 ‘단독’, ‘속보’로 눈코 뜰 새 없다. 진리가 모호하고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다니고 조변석개하여 뭐가 사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중심 잃지 않고 그 너머의 주의 섭리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주 앞에서 무던할 수 있기를.
아침에 일찍 글방에 올라가 가늘게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았다. 그 길을 따라 온기가 듣는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아침에 적어둔 묵상글을 다시 읽고, 책을 끌어당겼다. 요즘은 설교 원고를 한 번에 작성하지 못한다. 서너 시간을 꼬박 앉아 있기가 어려워서다. 옥스퍼드 주석을 읽고 메모를 하며 본문을 이해하는데 아침 시간이 다 갔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는데 몇 번을 멈추어 서야했다. 유난히 걸음이 느리고 허리가 아팠다.
주신 삶에 충실 하는 것. 내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이를 개선하고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데 있지 않았다. 묵묵히 주가 어찌 인도하시는가, 그 소망을 붙들되 목표는 아니다. 이미 맡기신 오늘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누가 나를 현재에 두셨는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신뢰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당장에 성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서서히 거의 미세하여서 때론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한 날 한 날의 평범한 일상이 모아지고 모아져서 어느 날 문득 어! 달라진 모습에 놀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요즘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묵묵히 주만 바라는 데서 주를 의지할 수 있기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부쩍 목사들의 이름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저마다 자기 의를 구하는 모습에 나는 겁먹었다. 내로라하는 대형교회를 ‘운영’하고, 그런 저들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대체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늘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 이런 소릴 하는 게 민망한 일이긴 하나, 믿는 자가 세상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니까 말이다.
명분과 원칙에 사로잡힌, 지독히도 종교적인 세상에서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3).” 하긴 이 나라가 너무 미신적이다. ‘운빨’에 미래를 맡기고 온갖 잡신을 끌어들여 하루가 멀다 하고 푸닥거리를 일삼는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하는 다윗의 기도가 청아하게 들리는 듯하다(시 68:19). 주께 맡기고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몇 걸음을 떼다가도 옆구리에 손을 짚으며 이것으로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감사하였다.
하루가 늘 그 날인 것 같은데, 보는 데가 달라지고 느껴지는 바람의 결이 다른 것이다. 전에 같지 않다는 어떤 막연한 변화 앞에서 주저하다가도 그것으로 더욱 주를 구하는 마음에서 안도한다. 끝 간 데 없이 내몰려서 기어이 벼랑 끝에서야 주를 바라는 법이다. 열왕들의 끊임없는 죄의 반복을 아내와 같이 읽으며, ‘아! 참 질기다’ 싶은 게 죄였다. 어쩜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게 우리 자신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언제든 불쑥 일어나는 불순종의 연속은 감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혹시 몰라 또 다른 신당을 두고, 이방의 것에 현혹되기도 하면서.
그래 맞다. 미혹하는 영이다. 영을 다 믿지 말라는 설교 본문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아예 대놓고 대적하는 무리에 대하여는 알겠는데, 참으로 교묘하여서 ‘우리 목사님’이 ‘내 교회’가 그러할 땐 이를 어쩌면 좋을까? 정치적인 성향은 사람의 본질이겠으나 좋은 말만 귀담고 사는 저들의 넉넉함이 죄다.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다섯 번 썼다(요일 2:18, 22, 4:3, 요이 1:7). 대놓고 안티, 그보다 더 정교한 대적이 있다.
미쳐 날 뛰는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 명분도 신념도 원칙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신의도 아니며 저들과 돈독히 지내는 책임도 아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세례요한의 때와 다를 바가 없다. 만물 위에 계신 이를 바라는 것.
결국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이 간단한 명제를 주목해야 한다. 주 앞에 더욱 겸손하기. 그러므로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19).” 하는 원리 앞에 숙연함으로, 곧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28).” 복 있는 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거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이 간단 명료한 말씀을 입 안 가득 머금고 되뇐다. 오직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 삶. 그것으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있다. 내 의지나 나의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주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으로 사는 일. 그러므로 세상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람들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 오히려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주가 더하셔야 할 일이다. 나는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에 족하다. 다 떠나고 홀로 남겨진다 해도, ‘내 영혼 안에 자연보다 더 신비로운 게 있습니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욥 26:14).”
주님의 광대하심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다른 무엇을 두려워하리.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오늘 여기에 나를 두신 이가 또한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7-8).”
아, 감사하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 맡기신 바 나의 한 날에서 나의 몸과 함께 생각을 주께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오늘 다윗은 노래한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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