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향하신

전봉석 2017. 10. 29. 07:40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에스겔 8:7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교회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느꼈다. 우리 어린 성도들은 헌금을 낼 수 없으니, 하나님이 따로 예비하시는가. 주인이 건너와 커피를 한 잔 같이 했다. 옆 사무실 누가 나가게 됐고 새로 오게 되는 이는 누구고 자신은 어찌어찌할 것을 쭈욱, 설명해주었다. 그리곤 서로 들고나는 때에 새로 계약을 써서 그냥 오십오에 임대료 관리비를 한데 묶자, 하는 것이다. 평소 월 임대료가 오십에 평균 관리비가 십오, 십육만 원을 오락가락하였다. 그런데 저의 말이 흡족하였다.

 

뭘 깎아드린다는 개념보다 더 나오면 더 나오는 대로 덜 나오면 덜 나오는 대로, 제가 후원헌금을 한다고 생각해주세요. 여름이나 겨울철엔 아무래도 몇 만 원이 더 드는데 그런 거 저런 거 복잡하니까, 그냥 글방만 오십오로 하시면 어떨까요? 당연히 우리야 고맙지. 이게 어찌 되는 영문인가 모르겠다. 요지는 그냥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더했다. 그리고 이 방을 계속 쓰든 지금 자기 방으로 옮기든, 것도 편하실 대로 하라는데. 것도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다.

 

교회였구나. 뜬금없는 나의 깨달음이 한심할 정도였다. 보기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저들 마음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고마움이 깃든 것이다. 내가 한 게 아니다. 그저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 해봐야 또 뭘 했겠나.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얼마 전 저기 복도 정 중앙에 위치한 무슨 보험 일을 하는 이가 찾아와 혹시 자기 자리로 옮길 의양이 있느냐, 자신은 천에 오십에 있는데, 원래는 천에 백은 줘야 하는 자리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이고 정 중앙이라 위치도 좋고. 나무랄 데 없는 제안이었다. 한데 바로 그 옆이 교회지 않나. 저에게 그 말을 해주고 아무래도 그건 아니지 않겠나, 하고 거절을 하였다.

 

그때도 좀 의아했던 게 아무리 어떠니저떠니해도 일부러 찾아와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줄 리 없지 않나? 그러니 이번 일도 그렇고, 저들 마음을 움직이시는 게 하나님이심을. 나는 다만 그 자리를 지키는 자일 뿐 달리 어떤 행동도 취할 게 없는 것이다. 오후에 아내와 딸애가 나와 전후 설명을 듣고는 신기해하며 흡족해했다. 어쨌든 당장 실질적으로 지출에서 십만 원 이상은 족히 빠지는 셈이고, 무엇보다 그리 마음을 써주는 데 따른 신비함을 우리는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오늘 말씀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하나님의 교회가 우롱당하고 있다. 그저 작은 구멍인 줄 알았는데 아무나 드나드는 문이었다.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겔 8:7).” 별 거 아니라고 여긴 데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가.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6).” 각종 가증한 것들로 가득 채우는 것은 물론이고 되레 주가 우릴 버리셨다 한다(9-12). 여인들이 성전 문에 앉아 곡을 하는데 주를 향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담무스에게였다(14). 또한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태양에게 예배를 한다(16). 그 땅에 폭행이 난무하고 노여움이 가득하여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17).

 

참담함이다. 교회가 장사 터로 바뀌고 영성을 판매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예배는 행사가 되었고 각종 이벤트가 주를 이룬다. 그저 담에 구멍 하나로 생각했는데, 그 담을 헐어내니 타락의 문이 나왔다. 아, 마침! 에베소서를 읽고 있으면서 교회에 대해 말씀을 읽고 있는데 서로 그 의미가 통하였다. 그렇구나.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사람들이 온다. 예상도 못한 시기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폐망과 그에 따른 저들의 끝도 없는 타락을 목격하게 하심으로, 다시금 나의 마음을 다잡게 하시는구나. 얼추 벌써 이곳으로 온 지 2년. 곧 재계약을 할 즈음에 일련의 일들이 동원되면서, 그래 맞다. 글방은 교회였다. 새삼 이렇듯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신다. 아, 어째서 나 같은 사람을 여기 두셨는가,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그리하여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 행여 우리가 이루는 줄 알고, 나의 노력과 수고를 음미하게 될까봐. 이에 따른 보상으로 은혜를 누릴까봐. 그래 맞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게 없게 하신다. 모르겠다. 다른 교회들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늘 보면 선택한 적 없고 선별하여 예상했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성도가 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기도제목 가운데 어쨌든 교회이지 않나. 우리로 선한 영향력을 끼침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러기엔 너무 보잘것없고 하는 것도 없는 처지이나 그래서 더 교회가 우스워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할 따름이고 또한 두신 데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서너 명 이상 온다고 했다. 아이들이 직접 김밥을 싸서 만들어 먹기로 했고, 폐품을 가지고 무슨 놀이를 만들자고 했다. 은근히 들떠 있었나? 혹시 안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 또 실망하지 말고! 아내는 주일 날 쓸 장을 보면서 내게 말했다. 어쩌겠나. 실망도 내 몫인 걸.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부둥켜안고 사는 일이다. 어쩌겠나. 누구는 거리낌으로 누구는 미련함으로 누구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그리 알고 사는 것이다. 나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라 자주 칭얼대고 또는 꿀꿀하다가도 금세 또 기대에 차 마음이 들뜨곤 하는데, 어쩌겠나.

 

성공적인 성도는 없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란 없다. 그리 만들어져 가서 성공하는 게 성도고 완성하여서 완전해지기까지가 교회 아닌가. 그러니 나야말로 모자란 사람이라, 오직 주만 바랄 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나타나는 게 성도로 자라가는 게 아니겠나. 번듯하니 웅장하고 그럴듯하니 멋들어질 뿐 결코 이 땅에서 완벽한 교회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들이 모여 그것을 앎으로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곳.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누군 한 달란트로 누군 다섯 달란트로 누군 두 달란트로, 그게 뭔 차인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분량대로였다. 누구 부러워할 거 없고, 괜히 부끄러워할 거 없다. 부르심에 따른 행함만이 중요한 거였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응하는 나의 삶이 균형을 맞추어 평형을 이루는 것이 성도의 삶이겠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

 

성도의 삶이란 그런 것이어서 그저 무던하여서 나무 같이, 그저 순응하여 바람 같이. 주가 하시는 대로 하시게 하는 삶이 복되었다. 그저 작은 구멍 정도로 여겨지는 것으로 우리의 죄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오늘 본문을 나는 그리 읽었다. 들어가 보니 가관이라. 엉뚱한 데 곡하고 쓸데없는 데 경배를 하고 있었으니, 하나님을 우롱하는 일이었다. 행여나 우리의 남은 생에 그러한 일이 없기를. 우리 교회는 결코 그러한 자리에 빠지지 않기를.

 

그저 말씀을 읽고 찾아보고 생각하며 확인하고 만족하는 게 아니었구나. 말씀은 듣고 따르고 행하고 순종하며 감사하는 것이었다. 내게 들려주시는 은혜가 크다. 나는 새로 한 보조기를 신고, 여기저기 더 아프다. 걷기가 불안하여 지팡이도 짚는다. 어제는 일부러 멀리까지 걸었더니 삭신이 쑤시고 힘에 부쳤다. 하다못해 이것도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 일인데, 하물며. 딸애와 아내가 지하에 내려가 장을 보는 동안 나는 혼자 밖에 앉아서 생각했다. 말씀으로 산다는 일은 결코 막연한 게 아니었다.

 

주가 하신다는 건, 내가 하려는 걸 놓을 때이다. 그때에 오늘 말씀이 크게 들린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