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에스겔 7:9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편 116:3-4
옆 사무실 둘째 아이가 내 방으로 건너와 인사를 하고 잠시나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탈북하여 내려온 지 3년 반 만에 폐업을 결정하였다. 벌써 2년 전 우리 교회가 인천으로 오고, 석 달 만에 저의 사무실을 우리가 쓰고 저가 옆으로 옮긴 셈이니까 이래저래 우리 인연도 깊었다. 어디 보험사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무슨 외국계 다단계를 홍보하며 가입을 종용하였는데. 둘째 아이는 무심하니 엄마의 그런저런 일련의 사정을 수다 떨 듯이 늘어놓았다. 여자는 종이컵이며 무슨 티백 종류의 차를 내게 가져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글방에 오너라. 나의 말에 아이는 싱겁게 웃었다. 중3이다. 학교 끝나고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었다. 다들 아홉 시가 넘어서야 귀가를 하니까, 자기 세상이라고 좋다고 하면서도 외롭다는 표현을 썼다. 일 년 전쯤 한 달 정도 와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아이는 별로 재미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뭇하게 웃자란 수염에 각진 얼굴, 떡 벌어진 상체에 다부진 하체가 영락없이 덩치 좋은 남자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거드름을 떠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남한으로 들어오기까지 1년 반을 제 3국으로 돌며 어찌 고생했는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죽을 고생’ 하고 내려와 보니 각박하기는 남한도 마찬가지라. 돈에 치여 다들 머리가 돈 것처럼, 두 부부는 불철주야 돈벌이에 여념이 없었고 다 큰 아이 둘은 쓸데없이 돈 쓸 일 만들지 않겠다는 듯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너 번 아이에게 확답을 하듯 글방에 오너라. 엄마 사무실도 없으니까 더 편하게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앞서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엄마는 저도 사투리가 저쪽 사람인 듯하였다. 다음 주 중에 아이를 데리고 한 번 와도 되냐고 물었다. 저들의 특유의 말투는 당당하지 못하고 화가 난 듯 말하는 것이다. 아이가 발표를 못해서, 철자법을 자꾸 틀려서, 하며 그런저런 사정을 말하는데 화를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이 정도인가, 하는 투였다. 여기 애들도 다를 바 없다고 말을 건넸으나 들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다시 올지 어떨지, 옆 사무실 둘째 아이나 4학년 애 아이엄마나, 모를 일이다.
여기는 교회라는 데 자꾸 글방으로만 들으려고 한다. 종교적인 또는 뭔가 영적으로 꺼려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축소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는 걸 이젠 조금 눈치를 챘다. 대체로 교회에 실망하는 경우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 따른 실망이다. 폐업을 하는 저들 가족도 남한에 내려와서 1년 넘게 저쪽에 있는 어디 큰 교회를 다녔었다고 했다. 온 가족이 다 말이다. 결론은 적성에 안 맞는다나. 목사가 어떻고, 가르치는 게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그래서 더는 교회에 안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교회는 그렇듯 만족함을 얻기에는 확실히 부족하다. 사람 관계로 이어가든, 목사의 됨됨이로 버텨보든, 아니면 각종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유익을 도모하든. 그렇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란 교회가 원래 반감을 갖게 하기에 딱 좋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할 수 없고, 죄를 언급하기에는 직설화법보다는 돌려서 추상화하거나 일반화시키거나. 아니면 껄끄럽기만 한 게 교회다.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안락한 시설에 편리함을 갖춰 좋은 프로그램을 계발하여 사람들의 참여를 도모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큰 교회가 더 커지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나는 우리 교회가 글방이 교회를 능가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전에는 글방이 교회 된 것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교회가 글방 되는 일에 주의한다. 아이들을 돌보고 선행을 이루는 게 목적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오게 하는 게 목적도 아니다. 그런저런 계기로 왔다가도 교회로 남는 교회였으면 하고 기도한다. 심판과 구원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길 바란다. 아이들을 통해 그 엄마가 잃어버린 신앙을 찾기를. 어디서 버렸는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글방에 오너라. 하고 아이에게 말했더니, 요즘도 일요일에 교회 하나요? 하고 물었다. 저에게 각인된 인식이 다행이었다.
성경에서 심판과 멸망을 말씀하실 때 나는 절절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겔 7:9).” 너 아주 혼쭐이 날 줄 알아. 다시는 밥도 안 차려 줄줄 알아. 벌거벗겨서 내쫓을 거야. 하고 야단치는 부모의 마음을 말이다. 나가 죽어. 한다고 해서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시 116:3-4).” 스올의 고통이 나를 두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환난과 슬픔을 만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것으로 ‘내 영혼을 건지소서.’ 기도할 줄 알게 하시려고.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 6:15).” 질투 없는 사랑이 그게 어찌 사랑이겠나? 사랑하는 이가 뭘하든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어찌 사랑이겠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부산하게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는 옆 사무실 아이엄마에게 뭐라 말해주고 싶은데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남한에 내려와 교정교육으로 6개월 모 처소에서 지내고, 이쪽에 거주하면서 남편과 1년 반을 별거를 했다. 여기 사무실을 얻어 바닥에 모포를 깔고 생활하기를 수개월을 했더랬다. 그러다 애들을 생각해서 다시 합친 게 얼마 전이라고 들었다. 간헐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그나마 여기 사무실이 운영이 좀 될 때였다. 그런데 그 돈으로는 탈북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고 북에 돈을 좀 보내고 자신들이 남한에서 생활하기에는 너무 빠듯했던 것이다. 나는 저가 귀가 얇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기위해 그런다.
젊고 괜찮은 여성은 돈벌이가 쉬운 쪽으로 자꾸 빠지고, 그러다보니 사회적 인식도 안 좋아서 남한 남성이 북한 여성을 보는 눈이 곱지 않은 것이다. 드세고 억척스럽거나 교묘하여 음흉하거나. 그리 인식된 데는 서로의 책임이 있겠으나 그리하여 하던 일을 작파하고 이 일 저 일 다른 일에 뛰어드는, 중년의 여자가 안쓰러웠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 여성의 보험원이라니! 앞서 다단계도 전혀 설득력이 없던데. 괜히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 나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가만히 있다, 너는 이제 글방에 오너라. 아이에게 여러 번 말했다.
교회란 참 특수한 환경이다. 왜 바울 사도가 교회들 앞으로 편지를 써야 했는지 알겠다. 자칫 추상과 환상에 빠져 조만간 예수 재림만을 바라며 아무 일도 않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아니면 까다로운 집단의식과 공연한 예배의식들로 논쟁이 끊이지 않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예전의 율법을 슬그머니 끌어들여 과거로 역행하려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그렇다고 주님이 바라고 세우신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향해 바울의 애끓는 서신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른 교회를 염두에 둘 거 없다.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이 하신다. 우린 다만 그 일에 수종들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는 고작 참여만 하는 것이다.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럴 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인 것 같다. 뭘 좀 해보려고 하다 보니 도로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어떤 의식과 예식에 주력한다거나 엉뚱한 신비에 젖어 예수 재림 날만 턱을 괴고 기다린다거나. 그러지 마라. 바울 사도의 언급은 이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곧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나는 비켜나야 한다. 성숙은 번잡하게 활동적이며 열심을 다해 주변의 것들을 수용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조용하고 때론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참고 기다리며,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과 기준에 더는 종속되지 않는 것.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시끄럽고 말이 많아 하는 일도 없이 바쁘면서 늘 분주하여 겉으로는 화려한데 내밀하게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나는 다소 무모할 정도로 주께 맡기기로 하였다. 너는 이제 글방에 오너라. 네 번짼가 다시 말했을 때 아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네네, 생각해볼게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초딩 4학년 탈북자 아이엄마가 진짜 올지, 옆 사무실을 나란히 쓰던 이 여자가 이제 보험을 배워 어디서 뭘 하고 돈을 벌지. 나는 공연히 생각이 많아 휘휘 머리를 저었다.
아내가 고구마 맛탕을 만들어와 서너 개 집어먹고 우린 같이 저녁예배를 하였다. 이런저런 상황들을 아내에게 들려주느라 앞서 시간이 오래 지체됐다. 모처럼 딸애도 말미에 와서 같이 끝내고 올라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생각하게 하시면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기도하게 하시면 안쓰러움으로 저에 대한 생각을 붙들고 있는 것뿐이고.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나는 확신한다.
내가 귀를 기울일 때 주님도 다 듣고 계셨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그러니 에스겔의 끔찍한 심판의 예언이 또는 저주의 말씀이 나는 자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구애로만 들린다. 이제, 오너라. 돌아오너라. 그만큼 기다리시겠다는 소리로만 들린다. 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그러므로 “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0) | 2017.10.30 |
---|---|
우리에게 향하신 (0) | 2017.10.29 |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0) | 2017.10.27 |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0) | 2017.10.26 |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0) | 2017.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