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에스겔 33: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하는 일도 없이 하루가 고단한 사람이라, 공연히 우울하였고 어디가 자꾸 아팠다. 점심을 먹으러 올라갔다가 늦게 일어나 그제야 씻는 아내를 보고 도로 내려왔다. 전날에 약간 위경련기도 있고 해서 종일 굶었다. 속을 비우니 정신은 맑은 듯하였다. 천천히 걸어 오가는 그 짧은 길이 내겐 항상 멀게만 느껴진다. 시무룩하여 마음이 어지러웠다. 다들 나름의 삶을 산다. 뭐라 한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뭐라 하는 일조차 때론 과분하다. 그건 아니야, 하고 말해주면 영락없이 거리를 둔다. 가령 사실혼을 주장하며 동거를 사사로이 여기는 일에, 요가를 옳지 않다하니 트집 잡는 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아이들 다섯이 한꺼번에 수업을 오는 날이었다. 둘이 오고 셋이 같이 와서 서로들 으르렁거렸다. 한 아이가 끼면서 서로의 사이가 뒤틀렸다. 얘가 누구랑 붙으면 다른 애들은 졸지에 따돌림을 당한다. 늦게 와서 한 애 곁에 앉겠다는 걸 일부러 내 옆에 앉혔다. 그 재간이 보통이 아니라 투덜거리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뭘 자꾸 트집을 잡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럼 또 덩달아 곁에 있는 아이도 그리 한다는 것이다. 그저 신기할 정도로 그럼 또 둘, 셋 서로는 갈려 으르렁거린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내가 누구인가 일깨우신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7).” 나는 이를 주저하거나, 하고 난 뒤 늘 마음이 우울하다. 아니라, 하면 더는 거리를 두어 나를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말을 말자, 하고 건성으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하려고 하면 내 속이 타는 듯 하고. 이를 뭐라 이르면 ‘너나 잘해.’ 하는 식으로 외면당하는 꼴이라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라 마음은 공연히 저 혼자 침울하였다. 아이들이라면, 호되게 야단을 쳤다. 딱 그 애를 지목하여 말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저들 사이의 일에 대하여. 참 신기하지? 그처럼 이간하는 아이가 있고, 죽 끓듯 따라가는 아이가 있고, 시치미 떼며 자신은 예외라는 듯 방관하는 아이가 있다. 어른들 사이의 일보다 투명하여서 나는 아이 다섯을 놓고 그와 같이 선명함에 놀랐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11).” 설령 그것으로 모두의 미움을 산다 해도 내 일이 되었다. 늘 잘 해주고, 친하게 굴고, 뭘 해도 좋다 잘한다 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나의 말에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줄 줄 아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럼 사이가 안 좋아지는데요? 아이의 질문은 명랑하였다. 그래서 잘못을 보고도 그냥 좋다고 하는 게 친구냐, 그래도 아니라 하고 말해주는 게 진짜 친구냐? 나의 말에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의 상황과 이를 자기 이야기로 가져와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음 주에는 ‘이런 친구, 꼭 있다.’ 하는 주제로 글을 쓰기로 하였다. 한참 어울려 다니면서 서로들 끼리끼리 어울리는 중이라, 아이들의 시샘과 공연한 주권 다툼이 선명하여서 교훈이 되었다.
내가 우울하였던 이유를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야 알았다. 아이들은 종종 '투명한 선생' 같다. 누구에게 뭐라 했을 때,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주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 해도 그에 따른 반응으로 나는 상처를 받거나 보상을 얻으려는 것이다. 누가 알아듣고 크게 동조하면 덩달아 뿌듯한데, 공연히 말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은 때는 졸지에 빙충이가 된다. 우울하고 서글퍼지는 것이다. 그래봐야 듣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불편하게 내가 그러나 싶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시고 오늘 본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갈하신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겔 33:27).” 듣고도 돌이키지 않아 각자 저마다의 자리를 고집하는 데는 주의 노여움뿐이라. 어쩔 것인가?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동거를 마치 사실혼처럼 여겨 좋으면 됐다는 식으로 여기는 이에게, 요가나 점성술, 심리치료 따위를 대수롭지 않은 듯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이에게, 그 혼탁함에 대하여. 아니라,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그러해서 좋았던 사이가 흩어진다 해도. 그럼 친구 사이가 멀어지잖아요! 하는 아이의 볼멘소리에 나는 다소 생뚱맞게 대답하였다. 그 정도의 친구라면 저는 친구가 아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마치 대단한 우정인양 영원을 운운하며 지껄여대는 꼴이라니! 돌연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취향과 이득을 위해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게 무슨…. 말을 듣는 게 친구다.
뭐라 하던 저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까닭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냥 늘 좋다 좋다하고 아니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해주는 건 친구가 아니라 원수다. 나는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그 투명하고 명랑한 반응에서 배웠다. 그럼에도, 듣기 싫어해도 말해주어야 하는 거였다. 저를 두고 주 앞에 애곡하는 게 친구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말면 더는 친구가 아닌 것이다. 주님은 끝내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친구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
공연히 멀어질 걸 두려워할 거 없다. 전처럼 편하게 지내지 못할 걸 염려할 필요도 없다. ‘친절한 타인’은 널렸다. 되레 과도한 친절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정도이다. 90도로 꺾어 인사를 하고, 두 손으로 떠받치듯 명함을 건네며 ‘사랑합니다.’를 연발하는 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도에서다. 친구라 하지는 않는다. 친구란 서로 고백하고 부끄러움도 나누면서 함께 주 앞에 설 수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는 것을 성경은 바라신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그리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뭐라 한들, 도무지 듣지를 않는 친구에게는 우리의 친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아뢰는 일이다. 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중보보다 강한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러게. 내 안에 이는 숱한 강점과 싸우는 일은 마치 안개를 상대로 이를 물리치려는 일과 같다. 기껏 고하고, 또 아뢰어 주께 바라고, 저에게 말한 뒤, 밀려드는 두려움과 불안과 서운함과 서러움과 시무룩함과 무시당한 듯한 느낌과 수치심과 근심 들을 내가 어찌 또 일일이 상대하며 물리칠 수 있겠나. 헤치고 헤쳐도 자욱한 안개 속 같은 마음일 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나를 위로하신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어떠하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믿음은 내게 주신 강한 힘이다. 모두가 맞다고 해도 나는 말씀 붙들고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려고. 때론 그 일이 나를 외롭게 하고 우울하게 몰아세우시지만,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신다.’
다들 사는 대로 산다. 좋아하는 말을 해주었다고 좋은 사이로 지낸들. 가령 싫은 말을 하여서 껄끄러워진 사이가 되었다고 한들.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설령 거기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주가 거기 계신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나의 주파수는 말씀에만 맞추고 기도로 그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며. 묵묵히 가자. 사람 보지 말고, 아이들 붙들지 말고, 그때마다 술렁거리는 내 마음에 연연해하지도 말고. 주의 손이 나를 붙들고 계심으로 나는 건재하였다.
어쩌겠나. 그저 괜찮다 괜찮다고 하는 이들에게, 저가 이고 가는 게 솜이라. 가뿐하여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치니, 그걸 이고 어찌 헤엄칠 것인지! 죽기 살기로 바동거려보니 힘에 겨워 죽을 지경이라. 괜찮다, 괜찮다 하던 것으로 인해 점점 더 가라앉는 형국이라. 이고 지는 가운데야 별 수 있겠나. 나는 저에게 말씀을 내미는 수밖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께서 이르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내 안에 이고 진 모든 안개 속 같은 감정들까지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곧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이보다 더 든든한 때가 있겠나.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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