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에스겔 35:10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3
오늘 본문은 ‘세일 산’에 대한 경고다. 세일은 ‘털이 많은’이란 뜻으로 에서의 후손들의 땅이다. 그러게. 알 만한 사람이 더 어렵다. 골이 깊고 패악을 떠는 게 남보다 더 잔악한 경우에도 보면, ‘안다’는 게 그래서 무섭다. 무심하거나 더 표독을 떨거나, 교회를 좀 다녀본 사람이나 ‘믿어봤던’ 사람의 경우가 그래서 완고한 까닭이겠다.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겔 35:10).” 주가 거기 계신다. 다 아심이라. 지켜보고 계신다.
나중이 처음보다 더 형편이 고약해지는 건 두려운 일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주의 은혜로 다시 돌이킬 수 있으면 감사한데, 참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게 굳어진 마음은 깨져야만 하지 하등에 쓸모가 없다. 가령 친구의 외면이 여느 사람보다 더한 이유도 거기 있겠다. 나를 잘 안다고 하는 저의 판단이 잠재의식 속에 있어서 말이다. 결국 깨뜨리시는 것도 은혜라.
일찍 올라가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전날에 초안을 잡아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놀랐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나오면서 맞춤하니 성경의 사사들을 중심으로 본문을 잡게 되었는데, 새삼 느끼게 된 것이 뭔가 특별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저를 특별하게 여겨주셔서 그러했을 뿐이라. 노아가 당대에 의인이라고 하나,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그 숨은 비밀은 하나님이 동행하셨기 때문이듯. 삼손, 참 그가 주는 교훈이 컸다. 잠깐 다시 가져다 묵상해본다.
첫째, 은혜는 은사가 아니고, 은사는 개인의 장점이 아니다. 은사는 은혜에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각각 더하신 것이다. 특별하다는 건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것이나 저가 거저 받은 것을 인식한다는 데 있다. 왜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이가 각각 제 몫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로 남겼을까? 더욱 넘쳐서 여섯 달란트를 남겼을 수 있거나 혹은 조금 모자라 네 달란트를 넘겼을 수도 있을 텐데. 은혜에는 마이너스도 없고 플러스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 마치 남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 삼손처럼 기고만장한다거나, 한 달란트 받은 이처럼 의기소침하여 알면서도 그저 묻혀 지낸다거나. 가끔 나는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다짐을 한다. ‘할 수 있는’만 두고 있을 땐 한 달란트 받은 이처럼 묻혀 지내고만 싶어지고, ‘해야 할’에 무게를 두면 신념이 나를 삼켜 하나님보다 우월한 듯 굴기 십상이다. 그 균형은 말씀이라. 설교 원고나 묵상 글을 쓰면서 가장 유익한 건 산만한 마음은 잡고 허황된 의지는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은혜는 은사와 다르다. 은사는 특별히 교사로, 목사로, 섬기는 자로 그 쓰임에 따라 세우심이다. 한데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 내가 뭐든 저와 다를 게 없고 그 특별함은 오히려 다섯 달란트만큼 또는 두 달란트만큼 내가 섬기고 충성해야 하는 몫을 설정한다. 은혜는 모두의 것이어서 다섯이나 둘이나 하나나 동일하다. 삼손의 경우 저는 이를 하투루 여겼고 득의양양하였으며 경거망동하였다. 잔인하였고 막무가내였으며 감정적이었다. 특별함이란 이렇듯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설교 원고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청소를 하면서 분위기를 좀 바꾼다는 게 교회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예배드리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좁은 공간 안에서 구별하여 그리 여겨지는 곳을 둔다는 건 사물의 배치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막상 또 그리 두니 원래 그랬어야 한다는 듯 모든 가구들이 일제히 말을 거는 듯 흡족하였다. 세 시간은 족히 혼자서 애를 썼다. 옮기고 쓸고 닦고, 이 좁은 공간에서 뭐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또한 만족함을 더하시는 게 신기하였다.
글방이지만 교회이지 않나. 교회이면서 사랑방인 셈이고, 드나드는 아이들이나 곁의 사람들에게도 여기가 교회임을 구분할 수 있어서 흡족하였다. 그러고 나니 사지육신이 쑤셨다. 아이들 수업은 마침 영화를 보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좀 누워 허리를 지졌다. 다 저녁에 장모가 오셨다. 노인네가 뭐 그리 공사다망하신지 평생이 바쁘신듯하였다. 같이 케이크를 불고, 짜장면을 시켜 저녁을 대신했다. 돌아와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곤이 잠들었다.
당최 요즘은 너무 일찍 깨우셔서 이처럼 말씀 앞에서 여유롭다. 그렇지. 둘째, 믿음의 지표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삼손은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다 아는 사람이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삿 16:17).” 왜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되었나? 가소롭게도 ‘한 번만’ 또는 ‘설마’ 하는 안이함이 주범이다. 이보다 교만한 것은 없는 듯하다.
너무 예사롭게 사명을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교회 옮기는 건 일도 아니고, 말씀 보고 기도하는 일을 한가로운 일로 삼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면서 믿는 자로 여기며 사는 우리네의 무덤덤한 안일과 나태가 화근이다. 문화가 그런 것이다. 웃자고 드니 죽자고 덤빈들 것도 우스울밖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이 너를 참 많이 사랑하신다. 특별히 널 더 사랑하신다. 어릴 때 늘 듣던 부모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쉰 살이 넘어서야 알겠다. 특별하다는 건 특별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이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이보다 더 큰 특별함이 어디 있겠나? 내가 나라를 구한들, 천만 명의 목숨을 살린들, 죽은 나무를 살리고 버려진 환경을 되돌린들, 그래서 더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들? 그러라고 주신 특별함이 아니었다. 우리가 안 하면 돌이 입을 열어 말하고 나무가 허리를 굽혀 일을 할 것이다.
다섯 달란트가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은 다섯 달란트를 다했기 때문이다. 두 달란트가 두 달란트를 남긴 것은 온전히 두 달란트를 다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걸 하되 해야 할 일에 하면 되는 것이다. 성령이 하신다. 그러므로 특별함이란 주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이 저와 동행하심이다. 그러므로 셋째, 우리는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지, 내려가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못 먹어도 고다.’ 여기는 주의 교회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가 이루신다. 나는 다만 두 달란트든 한 달란트든 반에 반 달란트든 온전히 그만큼이면 족한 것이겠다.
설교 원고를 출력하고 주보를 만들고 한 주를 마감하면서, 늘 그날이 그날인 듯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성경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누구의 생애는 다시 볼 때면 놀랍다. 성경은 그대로인데 그만큼 내가 변하는 것이었다. 저의 생은 그대로인데 내가 그리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그저 그뿐이라.
전에 어느 아이의 말처럼 거기가 신기루일 뿐이라면? 것도 괜찮은 게 주가 함께 하심이다. 죽어본 적 없으니 그 뒤의 영생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나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저들도 그 길을 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보다 불쌍한 존재가 어디 있겠나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바울도 다윗도 그 대열에 합류했던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결국은 예수님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개의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렇지.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이해하고 말씀으로 말씀을 삼을 수 있는 게 특별하지 아니한가. 누구에게 이런 특권을 주시겠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오직 주만 바라며. 넷째, 우린 항상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잃고 난 뒤에야 돌이킨다. 보면 항상 그러했다. 끝내 고집을 부리다 사업에 망하고 병에 걸리고 죽음이 임박하여 주께 돌아오는 이들의 ‘구슬픈 축복’이여!
어쩌겠나. 누구와 이야기하다 이를 한사코 외면할 때 나는 미어지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데야 별 수 있겠나. 흥에 겨운 듯 그런 노래처럼 살려고 드니, 오직 주의 긍휼하심만 바랄 수밖에.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장애인으로 사는 사람들이었구나. “만일 네 손이… 만일 네 발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손으로, 발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으로, 발로)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45, 47).”
이를 어찌 우리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처럼 큰 애도 오고 군에 간 아이도 휴가를 나와서 예배에 온다는데. 나는 마음이 벅차도록 바르게 전해주고 싶었다. 아, 그리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 사도의 충정어린 마음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다섯째, 선택하라.
결론적으로 오늘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니 너는 어쩔 것인가? 좋으니까 다인가? 남다른 축복으로 그만인가? 함부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굴 것인가? 그럼 결국 그것에게 붙잡혀 눈이 빠지고 끌려가면 알게 될 것이다. 조롱당하며 놋줄로 묶여 옥에 갇혀 맷돌을 돌려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느라 늘 사는데 찌든 인생으로 남들처럼 먹고 사는 데 놋줄로 묶여, 사는 게 감옥인 양 갇혀, 찌들도록 맷돌을 굴려 보면 안다. 어디서 두 눈을 잃은 것일까?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주만 바라자. 말씀만 붙들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살아서 아직 산다는 게 감사한 일인 것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럴 수 있는, 그래야 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다만 이제 주께 아뢴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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