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즐거움이 있나이다

전봉석 2017. 12. 20. 07:01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 12:13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안다면 속 시원할 것 같으나 오히려 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의연함은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굳건히 서는 일이겠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에 따른 기다림을 묵상하게 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성경에서 죽음을 묘사할 때 잔다는 표현을 쓰는데, 오늘 말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2).” 둘로 나뉘어 하나는 영생을 받는 자가 있고 하나는 수치를 당하는 자가 있다. 이를 앎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가 복되었다. 어떤 아이의 말처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할 때, 아닐 수도 있는 쪽보다 그럴 수도 있다는 쪽이 훨씬 더 낭패가 아닌가?

 

이를 확신하는 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믿음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나도 이것이 어떻게 믿어지는지 알 수 없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도 없다. 한데 우리가 사는 일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를 반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내게 은혜를 주시는지, 나 같은 자를 어째서 그처럼 사랑하시는지.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왕래함으로 길이 난다. 길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그래서 길들인다는 뜻은 밖에 있던 길을 안에다 내는 것이다. 이를 소설가 최인훈은 ‘주체가 아닌 것을 주체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 서술하기도 했다. ‘길은 객관적이고 규칙적인 반면 멀리 있는 개념이다.’ [왕래하며 지식을 더한다.] 살아보면 알 일이다. 끝내 나이가 다 차서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리 강조하고 그 뜻을 설명하려 해도 그 길이 없다.

 

요즘은 사장 부친이 아들 사무실에 출근하여 같이 일을 봐주면서 종종 글방에 들러 차한씩을 하고 간다. 그럼 그 노인 특유의 어법으로 젊었을 땐, 예전에는 하는 따위의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러다 보면 덩달아서 회고하게 되는 옛것들이 있다. 내가 지나온 길이면서도 너무 아득하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나머지 어느 부분이 나의 상상에 의한 것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이다. 그래서 그저 막연하여서 그랬었지, 하고 동조하는 것의 안타까움이 새삼스럽다. 그래서 나는 저이가 말을 할 때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다 저녁에 사장이 들러 이번 달로 정산하고 다음 달부턴 새로 계약을 하듯이 55만원만 내시라, 하였다. 한 마디로 관리비를 없이 해준다는 것이다. 얼추 10여만 원이 넘는 돈을 자신이 그냥 부담하겠다는 것인데, 나는 또한 이 일의 조화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가 교회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할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무엇이라고 저가 나를 좋게 여겼겠으며, 어떤 계기로 그와 같은 호의를 베풀겠나. 나는 이러한 때도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기다리라. 이 한 말씀의 의미를 나는 이 아침 다양한 각도로 묵상하여본다. 단지 죽음과 그 너머의 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게 아닐 거였다. 매순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때에도, 내가 어떻게 해볼까,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그러니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주가 이루신다는 것. 때론 지독하게 막연하여 내가 나가서 악을 갚는 게 나을 것 같은 때에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나는 저의 부친이 와서 장황하게 말을 이어갈 때, 또한 저의 난데없는 선처와 호의에도, 묵묵히 주를 바라며 구하는 것을 ‘왕래하며 배운다.’ 이게 말이 쉽지, 나처럼 조바심이 많아 한없이 가벼운 위인에겐 거의 도를 닦는 일이기도 하다. 전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그러고 있으니 때론 이 일 또한 설명이 안 된다. 그러니 이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로 하여금 그리 하게 하시는 이의 영역이라.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그래서 종종 물길을 묵상하는 일은 경이롭다. 골과 골을 내어 그 골을 따라 흐르는 물이면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길은 그 이치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까지 이르는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연상하게도 하는 것이다. 주가 돌보신다. 이를 물길은 여과없이 증명한다. 먼저 땅을 예비하시고 물이 흘러 곡식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 그러는 동안 나는 거기 있을 뿐이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쉼을 얻는다. 고작 초딩 5학년 아이를 응원하여 글을 쓰게 하고,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그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연중에 알게 해주려고, 나는 묵묵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다 저기다 내가 수선 떨 거 없다. 이 아이다 저 아이다 내가 조바심 낼 거 없다. 나를 여기 두시는 이가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 내가 무얼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무얼 하시는지, ‘너는 기다리라.’ 쉬다가 몫을 누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더 평온한 삶이 또 어디 있겠나.

 

내가 고마워하는데 저가 되레 고맙다고 하니 것도 희한한 일이다. 아, 복종이었구나.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무엇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러므로 길이란, 밖에 있는 것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다. 나를 길들인다는 말, 길을 들이는 데 있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무던함으로 또한 묵묵하여서 내가 주 앞에 온전하여지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글방을 들락거리는 모든 이들이 헛되이 왔다가 헛되이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바란다. 교회이니까, 나는 그 자리를 지킴으로 내 몫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생이 아닌 경우가 어디 있겠나. 노인들의 특징은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더듬으려 자꾸 했던 말을 또 한다. 저의 고난이 헛되지 않기를, 저희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조부모도 없이 혼자서 사셨지요. 불쌍한 양반이세요. 사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앉아 저의 말을 듣고 있을 뿐, 언제든 할 말을 내게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내게 주세요, 하고 주께 아뢴다. 뭐라 한들, 들으려하지 않는 말들에 대하여는, 그것으로 주께 아뢰고 구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단지 저의 푸념이나 듣자고 나를 여기 두시겠나. 기껏 아이의 하찮은 원고나 첨삭하라고 나를 여기에 두시겠나. 그게 아니라면, 나는 내 앞에 있는 이들의 말과 글을 읽고 들으면서 대답을 주께 하는 것이다. 저가 아직 할 줄 모르는 기도를 대신하고, 저가 아직 알지 못하는 주님의 은총을 내가 대신 삶으로 살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그리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

 

그렇지 않으시면 내가 무어라고.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5:3).” 저는 말하길 우리 글방이 오래 있었으면 좋겠단다. 비록 자신이 예배에 나오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참 좋다고 말하니까, 것도 희한하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두 부자가 아침저녁으로 글방에 들러 차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고 간 것이라. 하나님은 이를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오라 가라 할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주를 만날 수 있다면야!

 

아내도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일이 실제로 그러자고 하니 그게 자못 신기하였던가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게 때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왜? 하는 의문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주의 길이 따로 있다. 나는 새삼 느낀다. 그 길을 누구는 거슬러 올라가고 누구는 무난하여 흐른다. 내가 뭐라 할 게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6:1).” 오늘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분명한 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 길은 더욱 선명하여진다. 그리하여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 아, 왜 저들이 이 길을 따랐는가, 어떻게 이 길을 무던히도 또 길을 따라 걸어갔는가 알겠다. 허튼 데 마음 둬봐야 빤하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4).”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5).” 내가 일구어 곳간을 채우는 게 아닌 것이다. 주께서 줄로 재어 준 오늘의 나의 구역이 아름답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 이를 내게 알려주시는 주를 송축함이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곧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