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다니엘 9:18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자기고집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자복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그럼에도 여전하여서 아랑곳하지 않는 게 그것이었다. 30년 만에 만났으니 할 말들도 많다. 서로 알고 있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대화에 끼워 넣으니 점점 그 수도 늘어났다. 말 그대로 ‘단톡방’이란 게 그런 것이겠다. 왁자지껄 말에 말이 이어질 때 유독 기억에 확 들어오는 친구가 있었다. 당시 목회자 자녀가 나를 비롯해 셋이었다. 다른 한 친구는 그 부친이 기독교재단의 고아원을 운영하고 계셨으니, 그럼 넷이다.
그 가운데 한 친구는 특별하여서 늘 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뭘 해도 필기를 했다. 당구를 칠 때도, 누가 무슨 농담을 하면 또 어디 괜찮은 뭐가 있다 하면 그런 걸 다 일일이 기록하곤 하였다. 일찍이 나의 아버지도 어릴 때부터 설교를 공책에 받아 적도록 훈련시키셔서 무엇을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그 친구가 궁금했는데, 여전히 혼자 살고 있고 교회랑은 담을 쌓고 산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목회를 해야 할 사람이 그러고 있구나!’ 하고 엉뚱한 대답을 쳤다.
초저녁잠에 나는 ‘눈팅’만 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서로 간에 수백 통의 대화가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고, 어떤 묵직한 통증 같은 게 명치끝을 지그시 누르는 듯 아파왔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고 통회하며 자복하는 내용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
주의 긍휼이 아니시면 자복은 불가능하다. 내심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달은 순간이다.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기독교 쪽 아니야! 하고 말하는데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한 눈에 읽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어떤 기울기를 따져 축복을 운운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저울질은 없겠으나 그의 대화에는 절망이 느껴졌다. 가야 할 길을 멀리 하고 갈 때의 피로감이었다. 다 좋다고 하면서도 눅지근한 고달픔이 배어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친구는 목회를 하거나 주의 길을 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19).”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나는 종종 그런 데서 애착을 느낀다. 어느 대형 마트에서 실내청소를 하던 어수룩한 노인이 실은 어릴 때 아버지 친구 목사님으로 괄괄하던 목소리까지 기억에 생생할 때. 너스레를 떨며 실없는 소릴 잘 하더라 했더니 믿음 다 버리고 세상을 멀리 돌고 있는 친구를 볼 때. ‘주여 용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날마다 오늘이 화양연화라. 봄날은 간다고 하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주께 자복하는 날이 봄날이라.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고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주께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은총이었다. 목회를 할 사람인데, 하는 나의 뚱딴지같은 말은 막연하여서 구체적이었다. 우리 생에 광야 40년은 여전한 것이어서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딸애가 소개 받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면접을 보고 왔다. 당회에 올려 공식적인 절차가 있겠으나, 하나님이 아이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고 또 그렇게 인도하시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들 녀석은 뭐가 또 잘 안 됐는지 한 학기가 늘어나 내년 12월까지 학교를 다녀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전공과목 하나가 과락이 되었고, 그래서 졸업논문이 뒤로 밀리는 모양이었는데. 아내는 속상해서 말을 못하고,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기름을 빼는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꿈이 너무 거창하다는 건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할 수 있다.’로 키우면 그렇게 된다.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때 비로소 주께 향한 전폭적인 의뢰가 이루어질 텐데, 그러기까지 기름을 빼는 일은 서럽다. 광야 40년의 시절이 그래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아내는 오전에 아이 하나를 수업하고 오후께나 글방으로 나왔다. 딸애는 면접을 끝내고 돌아왔다. 우리가 한 뜻을 향해 생각하고 대화하고 어떤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만큼 복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인생은 결코 가벼운 감기 같은 게 아니다.
잘 살다 오라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다. 아들 딸 많이 낳고 유유자적하다 평안히 눈을 감으라고 이를 복이라 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그리 보여주지 않는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단 9:7).” 기어이 주 앞에 돌아오기까지.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 무던히 싸워야 하는 게 인생이다. 어떤 이는 이를 버렸고 어떤 이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죄를 범하였사오니 공의는 주께 돌리시고 수치는 우리에게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주께서 쫓겨내심으로 수치를 당하나이다. 한사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자기고집인 것이니, 뭐라 한들 들어 처먹지를 않는다. 어쩌겠나. 돌아야지. 돌고 돌아서 도는 날 동안 죽고 또 죽어 자신을 다 죽여서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겠으니.
뒤늦게 돌이켜 목사로까지 세우신 데 따른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다. 우리는 결코 은사로 살 수 없다. 은혜로 살아야 한다. 은사는 은혜를 더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지,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6).” 곧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여기서 유익이란 우리의 사는 날을 포함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주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 궁극의 행복이요 축복인 것을 알게 하시려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8-11).”
한 친구는 또 너무 ‘치유은사’ 쪽으로 기울어 혼자 인터넷 성경공부까지 한다기에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치유란 말에 혹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모색하려는 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게 더 망가지고 더 깨지고 더 멀리 돌아야 기어이 복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빌어서 비는 마음이 그저 오늘을 잘 사는 것이라면 그게 어찌나 허망한지, 30년 만에 열렬히 대화를 나누고 만나기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의 목적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어떻게 설명해줄 길이 없어 나는 대화창을 접고 눈을 감았다.
사는 날 동안 불안이 없는 이가 없고 고통과 근심이 끊일 날이 없겠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이로써 내가 더욱 주를 사랑하게 하시려고, 그럴 수 있기까지 나를 위하여 그 먼 광야 가운데서도 낮엔 구름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보호하심이었다.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라.
나는 누구도 대신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저를 위하여 기도함은 성령이 날 위해 구하여 오늘의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었던 것처럼, 오늘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다만 기도할 뿐이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아뢰고 또 구하여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2).” 하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그러나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 이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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