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세아 5:15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느낌은 선택이 아니다. 감정은 내 임의로 주관할 수 없다. 마음은 먼데 스스로 결심은 할 수 있다. 결단은 했으나 마음은 저만치 두고 있을 수 있다. 이는 위선이나 거짓된 행실과는 다르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닌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를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음은 다른 마음으로 둔갑해 어느 게 본심인지 알 길이 없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또 누구를 마주쳤을 때 내 안에 이는 좋음과 나쁨의 간극은 모호하다. 두 마음의 싸움이다. 성가시고 귀찮은데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일에는 이를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이와 같은 말씀은 그래서 넣어두셨구나. 흡족한 마음으로 임하면 참 좋을 텐데 그게 또 마음대로 되나? 그럼 싸워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6).” 이럴 땐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수밖에.
모처럼 자리가 꽉 찼는데도 나는 나오기로 하고 못 온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왁자하니 아이들은 예배시간을 지루해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견딤을 배운다. 오후께 아내가 종용하여 연습 삼아(?) 택시를 타고 조금 멀리 떨어진 큰 쇼핑몰에 갔다. 오고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힘들었다. 누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누구와 통화를 하는데 그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자꾸 돌아봤다. 예전에 다니던 모 고아원의 친구 같았다.
그냥 지나쳐서는 내내 생각이 기울었다. 아는 체를 해볼 걸 그랬나. 누구 소식은 좀 어떤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가족들을 따라 휘적휘적 쇼핑몰을 돌며 내내 저이 생각이었다. 얼핏 봐서 그가 그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먼저 인사를 건넸어야 했다. 그런데도 왜 그럼 그냥 지나친 것일까? 말씀이 꾸짖으신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저이가 교회는 다니는지, 결혼은 했는지, 믿음 생활은 어찌 하는지.
마음은 다른데, 생각은 그리 여겨질 수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마음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늘 이런 식인 내가 싫다. 쭈뼛거리고 머뭇거리고 뭉그적거리면서 생각만 잔뜩 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나의 나 됨을 주께 고하며 용서를 빌고 도우심을 구한다. 모처럼 아들애랑 나란히 앉아 아내와 딸애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계획이 있고 나름의 목표가 있는데 너무 돈을 좇는 것 같아, 이게 아닌데 싶었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마음에 두고 생각하기를, 주로 만족하기를.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족한 줄 아는 게 지혜이다. 이를 말로써 설명하기란 뜬구름 같아서 나는 가만히 아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이는 생각은 좌충우돌, 우린 숱하게 부딪치고 깨지고 뭉개져야 비로소 깨닫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탐내지 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누가 뭘 얼마큼 가졌든지 그건 내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채우시고 필요하다면 덜어내신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생각만하다 기도하였다. 내가 누구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는 싸움이 엄청나다는 소리이겠다.
우리 주님이 가장 인내하시는 부분도 참으시는 일이다. 주의 인자하심은 기다림으로 드러난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사랑은 결단이 아니라 무던함이다. 속전속결인 사랑은 없다. 우리가 서로 인격적인 관계란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과 기다림으로 배운다. 차라리 더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강제와 억압은 전인격적인 관계를 훼손한다. 뉘우치고 구하고 돌아서기까지.
고난을 받을 때에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결단이 아닌 실행으로 주를 구한다. 그리고서야 찬양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내가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이시길 원합니다. 내 생각이 내 마음을 주도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생각을 좌지우지 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나의 죄를 뉘우치고 주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그리하소서. 고난은 내게 주의 사랑을 일깨웁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창피했던 것이다. 또는 다시 이어질 어떤 관계에 대해 성가셨는지도 모른다. 기껏 저를 외면하고는 마치 아쉬워하는 듯 구는 나의 이중적인 마음을 감출 길 없다. 더 어릴 때 너무 강하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병원에 한 3개월 입원해 있을 때 참 예쁘장하고 귀여운 또래 아이를 좋아했었다. 아직 젖살이 뽀얀 그 애 얼굴이 참 고왔다. 같이 어울리고 병원 구석구석을 휠체어를 타고 기웃거리는 게 즐거웠다. 여간 붙어다닌 게 아니어서 다들 연애한다고 놀려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밖에서 그 애를 만났을 때의 낭패감이라니! 그냥 싫었다. 터무니없게도 그냥 싫어졌다. 그 애의 고운 얼굴도 상냥한 말씨도 친절한 동작도 갑자기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의 돌변했던 마음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의 간사스러움에 대하여, 그 위선과 허위에 대하여 나는 늘 신물이 올라온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나쁘고 덜 익어 떫은지 모르겠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의미를 둘 게 못 된다. 나의 마음이란 말이다. 거짓과 허상이 난무하다. 그러니 내가 이를 모두 해로 여김은 주를 아는 지식만이 고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배설물만도 못한 나의 감정과 생각을 더는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를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 나는 이제 주의 안에서 발견되길 원함이다.
그럴 때 바로 사랑할 수 있겠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그래야 다정할 수 있겠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주를 섬기는 마음이 아니고는 내가 누구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구나. 그저 필요에 의한 게 사랑이 아니다.
감정은 마땅히 준행해야 할 의무를 일깨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왜 기뻐해야 하는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아, 왜 이를 갈망해야 하는지.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이 모든 게 맡기신 일, 감정이었구나!
명령이시구나!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 15).”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 걸 내 감정에 따라 또는 기분에 의해 이끌리곤 하였으니, 그 결과는 환멸이었다. 소망을 갖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단지 나의 소망이 아니라, 이를 하나님께 두자. 낙심하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자. 주의 도우심으로 나는 찬송할 수 있다.
두려워할 걸 두려워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허튼 걸로 두려워할 거 없다. 주가 내게 평강을 더하신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아내는 곁에서 계속 괜찮나? 약은 먹었나? 견딜만하나? 마음을 쓰며 나를 돌보았다. 다음엔 전철을 타고 저기 중국인마을에를 다녀오자고 하였다. 나는 자신이 없어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두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살자. 내가 나 된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의 어줍고 어눌하고 어벙함이 주의 능력을 더욱 바라게 하신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 21:3).” 주의 영광이 나타나시기까지. 그리하여 나의 고백은,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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