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호세아 7:15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아이는 울먹거렸다. 병원에 사람이 많아 글방을 늦은 것인데, 애 아빠가 이를 이유로 기껏 주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도로 빼앗은 모양이다. 참 어지간하다. 뭐라 할 수는 없고, 초콜릿을 하나 주며 달래었다. 그래도 너무 자주 울컥하면 못 써. 사내 녀석이 조금만 뭐라 하면 금세 눈물이 핑 돌고, 그래서 어찌 살려고 그래. 다독이며 좀 더 강해지기를 기도하였다. 얼굴에 백색반점이 있어 더 안쓰러웠다. 늘 동생들에게 치이고, 억울함이 많은 아이였다. 주일에 나오면 좋을 텐데, 아이 부모는 무슨 이유로 그건 안 돼! 하고 막는 것인지.
아이를 향한 이런저런 마음이 주의 것임을 짐작하였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고후 8:1).” 그래서 가난이 극심한 가운데서도 주를 사모할 수 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2).” 자원하여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3).”
말씀을 읽으며 그 내용이 내 것이기를 간절하였다. 아이들을 대하고 또 누구를 위하는 마음이 억지로나 보여지는 것으로 하지 않고, 주의 은혜로 하는 것이었으면. 나는 아이에게 부모를 탓할 수는 없어 잘 이겨낼 것을 당부하며 응원한다. 또 금세 낄낄거리며 즐거워하는 것이 아이는 아이라. 내 안에 이는 이런 마음이 나의 본심이 아닌 데 종종 놀란다. 나는 저가 귀찮고 성가시고 차가울 정도로 외면하는 사람인데, 위하고 두둔하려는 마음이 때론 신기할 따름이다. 의무나 권리여서가 아니다.
어떤 자연스러움에 놀란다. 나는 본래 인자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안다. 그런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러면서 또 누가 울컥하면 같이 울컥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저절로 그리 되는 것에 대해서는 내 자랑이지 않다. 나도 낯선 나다. 딸애가 은근히 걱정이 되나보다. 막상 사역지가 정해지고 당장 토요일부터 가야 한다니까 말이다. 그럴 거 없다.
보니까 다 주님이 하신다. 우리 일은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하시게 나를 내어드리는 게 일이다. 그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많은 자들이 이 길을 가다 왜 파선하는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이처럼 주가 인도하심이 축복인 것을,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말해주었다. 닥치면 다 한다는 말을 순화하면 주가 함께 하심이다. 이때 우리 양심이 성령 안에서 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특히 아이들이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으로 어른들을 대하는 일보다 거칠고 위험할 때도 있다는 것을. 비포장도로 같다. 말 그대로 아직 길이 들여지지 않은 것이라, 아이도 종종 길을 잃는 마음이다. 그런 걸 같이 끌려 다녀봐야 소용없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이다. 이로써 눈물로 길을 내는 일이기도하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주의 이름으로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런 것이다. 다른 이에게 확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데야 별 수 있나?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8:4).” 때론 죽겠는데, 그래서 힘에 부쳐 눈물이 마르지 않는데. ‘눈물이 없는 눈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미국의 속담처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딸애가 감기로 심신이 연약해져서 회사에 조퇴까지 내고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며 생각하였다.
아, 그 원리가 있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나은데, 나는 늘 받기만 하니 민망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기껏 식사나 한 번 대접한다고, 것도 집에서 차려 수선을 떤 게 오히려 우리가 더욱 넘치게 받은 셈이어서 죄송하였다. 그런 거보면 줄 수 있으려면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줄 줄도 있다.
은혜에 대하여 그 값을 알 때 값어치를 안다.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는 말.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4).” 그런 마음을 내 안에 두시는 이가 나로 하여금 아이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저의 여린 심성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시는구나. 앞으로 더한 일이 수두룩한데 스스로 위축되어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야 되겠나. 나는 자꾸 아이를 부추기듯 잘한다고, 잘한다하며 축복하였다.
내 이 말의 비결은 이제 내 안에 이는 기쁨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하나님이 너무 좋아. 누구에게 고백하였던 말이 나의 영혼을 훈훈하게 하였다. 전에 그랬는데, 하는 간증 속의 손길이 아니다. 앞으로의 막연한 기대와 소망도 아니다.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 제일 좋다. 어떤 기쁨인가 하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가장 행복한 자인 이유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바라는 삶이 여기에서 지금의 것으로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4).” 역설적이게도 나는 갚을 길이 없어 더욱 송구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다들 어렵고 힘든 걸 아는데 분에 넘치게 받기만 하니 나는 어찌 말을 더 길게 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보상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이 말씀의 원리를 이제 조금은 알겠다. 예배도 드리는 자로만 여길 때 그 영광은 자꾸 내 것이 된다. 그러니까 예배는 받으러 오는 것이지 드리러 오는 게 아니다. 신앙생활도 하루하루의 믿음생활도 내가 날마다 받는 삶이어야지 뭔가 드리는 삶으로 오해하면 낭패라. 내 수고와 애씀을 부추겨 그 영광을 내 것으로 하려 든다. 그러니 우리 영혼이 얼마나 굶주려 있나! 내가 자꾸 받기만 하면서 드는 마음이었다. 받는 게 자꾸 민망하고 송구하기만 한 것은 받을 줄 모르니 줄줄도 몰랐던 것이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준다고, 덮어놓고 떠넘긴 사랑은 폭력이 되어 아이의 억울함을 달랠 길 없다. 쭈뼛거리며 기껏 받았던 선물을 도로 빼앗길 때의 서러움이라니. 다그치며 늦은 것만 나무라는 아빠의 꾸중을 반박할 수 없어 아이는 다만 울먹거리며 서러웠던 것이다. 서툰 사랑은 자꾸 단서가 붙는다. 나에게 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착하고 말 잘 듣고 약속 잘 지키는 아들이어서 말이야. 할 때 그 규정된 사랑의 조건은 진정한 사랑을 맛보기도 전에 왜곡된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가 따른다.
예배를 드린다고만 여겼지 나는 여태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내가 무얼 잘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 여겼지 하나님이 주시는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잘 받기만 해도 기뻐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어떻게 매번 받기만 해! 그러니 그 기쁨은 제한되었고 엉뚱한 오해가 생겨나 과분하여 부담스러운 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읽었다.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호 7:15).” 받을 줄 모르면 그런다.
기껏 힘을 주셨는데 이를 엉뚱한 데 쓴다. 굶주려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영혼은 괜찮은 줄 알았다. 왜냐하면 늘 열심이니까. 최선을 다해 주를 섬긴다고 섬기고 교회를 돕고 헌신하며, 매주 예배를 드리러만 갔지 받을 줄은 몰랐었으니까. 과분하여 이를 어찌 쓸까 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아!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8-9).”
잘 익었으나 수고가 탄다. 애씀과 노력이 눌어붙어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삼켰지만 저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늙어가면서도 자신은 아직 이팔청춘인줄 안다. 답답하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게 나였구나, 하는 깨우침과 함께 우리가 얼마나 엉뚱하게도 은혜를 소진하고 사는지를 묵상하게 된다. 뭘 자꾸 더 해야 한다는 부채감, 드리고 또 드리려니까 힘에 부치는데도 더 드려야 기뻐하실 거라는 오해 때문이다. 이를 엉망으로 만든 데는 교회도 한몫을 했다. 헌신을 강요하고 자꾸 드려야 하고 또 드려야 하는 것으로만 예배를 일삼으니 정작 받을 줄 아는 예배는 낯설고 불편한 것이다.
이를 바로 잡는 기도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내가 어떤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또는 뭔가를 드려서도 아니다. 염치없이 또 염치없어도 받고 또 받아도 되는 게 은혜였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잠시 단회적인 기쁨으로 한 생을 견뎌야 하는 게 아니다. 그와 같은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은 뻔뻔한 게 아니라 마땅하였다.
왜냐하면 비로소 주님이 기뻐하신다. 이를 반대로 어떨 때 슬퍼하시는지 오늘 말씀은 진술하고 있다.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4).” 혼자 울컥하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잘 말씀드리고 당당히 그 선물을 도로 달라고 요구하게 하였다. 성심으로 내가 주께 부르짖지 않고 그저 나 혼자 침상에서 슬퍼하는 게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럼 좀 위로가 되는 나름의 곡식과 새포도주가 있어서 버틴다. 참 나빴다.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16).” 엉뚱한 데 가서 위로를 찾으니, 값싼 행복만이 즐비한 것이다. 돈으로 떼우려 하고, 갖고 싶은 걸 갖는 것으로 그저 행복한 줄 아는 세대다. 더 영구적인 기쁨에는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였다. 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어디 보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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