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5-6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시편 83:16
불같은 날이 이른다는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안다. 그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한 자를 지푸라기처럼 태운다. 그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않으신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덜컥 두려움이 일다가도,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안도한다. 물론 다를 바 없는 나의 악함과 교만함을 치료하신다니 말이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회복의 약속이다. 모두가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던 때이다. 교수로 대표로 혹은 선배로 위치하던 이들이 추행을 일삼고 힘과 권세를 이용해 성폭력을 자행하면, 곁에서는 쉬쉬 입다물어주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자녀와 반목하고 자녀는 아버지를 묵살하던 때에 일어난 일이다.
주의 ‘치료의 광선’이 아니면 어찌 회복이 불가능한 사회다.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턱턱, 숨이 막히는 현상이다. ‘대학 교수 사회가 떨고 있다’는 헤드라인 기사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능글맞은 게 어른들의 특허 아닌가? 우린 얼마나 염치없는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최소한의 경건도 양심도 가책도 부끄러움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진 사실 앞에서 우리는 끝까지 모면할 길만 찾는다. 적당히 외면하고 덮어버리고 싶어 한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하는 기도를 읊조리면서도 두려워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무섭다. 늘 음란한 생각이 들끓고 위선으로 가려진 눈길에는 음욕이 항상 이글거린다. 나야말로 하나님이 이처럼 강제로 붙들어 세우지 않으셨더라면 어찌 됐을까? 나는 사회 곳곳 어디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오는 ‘미투’의 목소리가 아우성처럼 들린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보고 음욕으로 몸살을 앓던 대목이 떠오른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삼하 13:1-2).” 여기서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에서 사랑이라 표현하신 부분에 의아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머물며 생각하기를 저마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임을 생각하였다. 얼마나 야비하고 얄팍한가.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14-15).” 그런 것이다. 가해자의 특징은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다. 스스로도 얼른 외면하고 없던 일로 돌이키고 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자는 어떤지 잘 모르겠고, ‘남자들이란!’ 나 역시 백분 이해한다.
힘의 논리는 간단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고 누구나 강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부자나라’일수록 더 큰소리 꽝꽝 치면서 강압적인 힘의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는 국제정세는 그 속이 너무 빤하다. 부모라고 아이를 힘으로 누르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럼 또 신기하게도 아이의 반응은 더욱 또렷하게 그렇지가 않다. 순응하거나 반항하거나, 둘 다 병든 것이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그저 서로를 병들게 할 뿐이다.
한 아이가 있다. 저의 부친은 군인이었다. 위에 누나와 그 아이는 남들 다 부러워할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 취업을 하였다. 나는 아이를 고등학교 때까지만 곁에서 봐서 늘 반듯하고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다들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의 문란한 생활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럴 애가 아닌데, 소위 말해서 누구보다 밝히고 음란하여 여자 친구를 사귀면 동시에 동거를 하듯 데리고 있다 심통을 부리듯 또 다른 아이를 사귀곤 하는 거였다.
굼뜨고 늘 공수표를 날리듯 말만 번지르르하고 늑장부리고 꾸물대고 꼼지락거리다 결국 없던 일로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제부터는 그 아이와 무슨 약속을 하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만다. 공교롭게도 청소년시절엔 공부도 잘하고 예의바르고 경우가 바른 아이로 인식하고 있던 아이들인데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저들의 공통점은 강압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와 늘 참견하고 핀잔하기 좋아하는 엄마를 두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던 부모들 세대라 그런가, 한쪽은 너무 엄하고 한쪽은 너무 물러서 저들의 강압적인 태도는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의 예의바름과 착함과 순함과 무던함을 동조하듯 칭찬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강압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영락없이 사랑받고 싶다는 더욱 강한 욕구를 숨기고 있다.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강박의 배면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는 지시가 없으면 난감해한다. 선택장애를 보인다. 책임져야 하는 일을 회피하는 것이다. 지시 받기를 원하고, 지시한 것을 잘 이행할 때 우리는 순하다, 착하다로 인식한다. 그와 반대로 거칠 게 반항하는 경우도 있다. 늘 보면 그런 애의 말투는 시비조다. 번번이 반론을 재기한다. 이의를 단다. 큰소리친다. 호언장담하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나몰라라 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럴 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억울함으로 또 화를 낸다.
모두가 강압에 의한 방어기제로 자신의 성격을 형성하고 살 궁리를 하듯 자기보호를 모색한 결과이다. 일련의 사회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나를 돌아보고 내 아이들을 생각한다. 또한 거의 평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셈이어서, 그것도 늘 사춘기 어린 아이들의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나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보여주는 모습에서 낯설고 전혀 생소한 느낌을 받곤 한다. 다윗은 맏아들 암논을 사랑했다. 암논은 아리따운 이복누이를 사랑했다. 숱한 불륜남녀들이 사랑을 호소하며 모텔을 전전긍긍한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도입부분의 내용과 실은 그 사랑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중심부의 내용은 가히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하게 산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게 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요란할 뿐이다. 또한 그 능력이 남다르고 진심이 확실하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헌신적인 것으로 그 ‘몸을 불사르게 내줄’ 정도였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럼 대체 사랑이 무언가?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면, ‘사랑은’ 하고 정의가 내려진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4-7). 이게 우리네 사랑으로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낭만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정의는 감미롭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8). 그럼에도 암논의 다말을 향한 마음을 사랑이라 표현한 까닭은 무얼까? 나는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숨이 차다. 그저 막연할 때는 몰랐는데 내 이야기로 가져오면서는 늘 그렇지 못한 나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간 식어버리는, 암논과 같은 마음을 나는 잘 안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말씀은 나를 이끌어 나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심으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버려야 할 것들을 마주대하게 하시는 것이다. 왜 그처럼 마음이 어렵고 불편한가 했더니, 저들의 모습이 실은 나였다. 그리고 저들도 지금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단란하고 자칭타칭 ‘딸 바보’ 소리를 듣는 아빠들이어서 더 마음이 아리다.
오늘 구약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돌이켜야 한다. 돌이키기 위해서는 버려져야 한다. 나의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않으면 참 사랑은 알 길이 없다. 누군들 상처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사춘기 시절을 자랄 수 있었겠나? 핑계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가야 할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니 지옥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곳일 게다. 아,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나는 다시 되뇐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믿음과 사랑을 호심경으로 붙이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자. 성경이 말씀하실 때 귀 기울일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부디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그렇다면 이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아,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시 83: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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