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라기 2:16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편 81:11-1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에 대하여 묵상한다. 둘 다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종종 이혼을 꿈꾸고, 위선과 여러 화려한 핑계로 옷 입으며 나의 학대를 가린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는 나는,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언제나 내 편에 선다. 다 알면서도 나는 나의 허물을 양탄자 밑으로 밀어 넣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므로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사람이 얼마나 악한가. 어느 연예인의 성추행 사건 가해사실을 두고, 언제가 보았던 <아빠를 부탁해> 코너에서 보았던 그의 자녀들과 아내를 생각하였다. 저의 단란함이 그처럼 추하고 더러운 민낯을 숨기고 있던 것이라니. 딸애 친구 아이를 추행하고 살해한 후 암매장한 이가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느 저명한 원로 시인은 결국 수원시를 떠나기로 하였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보면서, 추하고 더러운 나의 본색을 생각하였다.
주어진 제시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설명하기를, 내 이야기로 읽혀야 해. 남 얘기 하듯 뒤로 숨으면 어느 작품도 감동이 될 수 없다. 감상을 요약하고, 내 이야기로 가져오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 성경에서의 이스라엘 이야기가 어찌 이스라엘만의 지칭인가? 그렇다면 어린왕자가 당도하였던 여러 혹성이 그저 그 혹성의 이야기로 그칠 것인가? 내 이야기로 가져오고, 우리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아이는 갸우뚱하며 어려워했다. 알겠는데 모르겠는 소리였다.
실은 저마다 내 이야기로 가져오는 것을 꺼려한다. 기껏 쓸어 담은 양탄자 아래의 쓰레기며 먼지투성이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이가 오기에 앞서 설교 원고 초안을 잡으며 본문을 메모했다(삼하 13-15장).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성추행이 아니다!), 금세 변심하여 내치는 대목과 2년여 동안을 마음에 숨겼다가 보복하는 저의 오라비 압살롬의 복수와 처음부터 다 알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아버지 다윗의 묵인이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도발이다. 왕좌를 빼앗기고 만다.
칠판에 저들의 행태를 메모하고 화살표로 연결지어보았다. 그리고 한참씩 앉아 응시하며 그에 따른 연관성과 묵인과 방조와 모략을 생각하였다. 가장 단순하게 원인을 살펴보면, 무질서한 사랑 관계일 것이다. 실타래처럼 엉킨 그릇된 사랑이란 이름의 자기만족이다. 다윗은 장자 암논을 사랑했고, 암논은 이복누이 다말을 사랑했다. 흔히 우리가 크게 여기는 부모의 사랑은 자칫 그 어떤 폭력보다 잔인하고 악랄하다. 부모의 끝없는 노력은 자식으로 하여금 자기비하를 유발하고 그러므로 자존감이 낮은 아이로 성장하게 한다.
지나친 걱정은 강압적인 사랑이어서 숱한 경고와 통제와 압력을 행사함으로, 오히려 아이는 빈둥거리거나 늑장을 부리고 자신을 스스로 방치하게 한다. 이런 부모의 특징은 실제 자신이 유약하다는 것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부모는 자식을 떠받들어 키운다. 그럴 때 아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혼란스러운 것이다. 또는 툭하면 ‘한 턱 쏘는 부모’가 있다. 저는 자신의 방임을 감춘다.
유약한 부모는 아이의 요구에 못 이겨 번번이 그 충동을 들어주고 방임하는 부모는 자녀가 간청하지도 않았는데 빈번하게 선물을 안긴다. 어쨌든 아이들은 넘쳐나는 선물-사랑으로 끈기가 부족하다. 이와 반대로 무슨 잘못을 보란 듯이 응징하는 부모가 있다. 나름의 신념이나 어떤 가치를 내세우지만 아이는 은연중에 부모의 적개심을 알아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적으로 나약한 부모의 밑에서 아이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해진다.
너무 바쁜 부모 밑에서 방치된 아이는 친밀하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가 서툴다. 번번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다윗에 대한 일련의 사건은 이 모든 형질의 특징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학교 아이들 수업을 하다가도, 아이들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선을 놓치고 칠판을 응시하며 여러 생각을 마구잡이로 해댔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외조부의 땅으로 은신하여 3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요압의 꾀로 저를 돌아오게 하였으면서도 2년간 저를 외면한다.
다윗의 묵인과 외면과 자기감정과 실제 취하지 않았던 행동사이의 번민의 결과가 참으로 끔찍하였다. 결국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나는 부분에까지는 이야기를 더 묵상하기에도 버거웠다.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오늘 말씀이 명징하게 들린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6).”
나는 종종 이혼을 꿈꾼다. 미안함은 초조함으로 이어지고, 어떤 부담감은 홀가분한 상태를 꿈꾼다. 그러느라 펼치는 나의 논리는 ‘지금이라도 나 없이 평안했으면!’ 하는 위선의 옷을 걸쳐 입는다. 여기서의 이혼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남녀 간의 이별이면서, 자신만을 위하는 방기다. 압력이고 응징이고 방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과 같이 주신 이에 대한 엄연한 반역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양탄자 밑에 쓸어 감춘 우리의 본색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다. 버젓이 아이 둘이 있는데, 아무리 이혼을 했다 해도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동거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은연중에 아이에게는 수치심을 안긴다. 아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아저씨를 자랑한다. 칭찬하고 좋은 점만 열거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엄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엄마를 내준 격이다. 엄마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아이에게는 소외감으로 다가온다. 이를 은폐하려 아이는 과도하게 친절하다.
한 아이 엄마는 유난스럽게 아이의 성적을 두고 환장을 한다. 이제 초등학교 3년이 되는 아이는 진단평가로 들들 볶이는가싶더니, 그런 가학을 즐기는 듯하다. 엄마의 잦은 참견과 간섭, 끊임없는 윽박지름과 협박의 결과는 과분한 선물로 바뀌곤 한다는 걸 아이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분에 넘치는 스마트폰과 갖가지 스티커며 액세서리가 아이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건 자기와 상관없다. 자기 이야기인데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아,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1-12).” 끔찍하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저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다윗의 이야기’에서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전환하여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이야기로써 여전한 ‘나의 어린아이’였다.
이로써 증거하고 싶은 본문이 있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감추고 있으면 영락없다. 담아둔 것은 곪아터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다’는 진리 앞에 선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시 90:8).” 내어놓고 토로하지 않는 이상, 날자! 우울한 나의 영혼이여! 저 혼자 꼼지락거려서 될 일이 아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주 앞에 선다는 일, 그렇지 않을 경우 오늘 우리 사회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민낯을 마주해야 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1-12).”
완악함이란 스스로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에 읽으려고 책상 위에 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끌린다.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 저는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인 자이다.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면서 뛰어들 것이다. 오백만 명의 유대인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앞에 몇 장을 훑어보다 전율을 느꼈다.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노라.’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니 내 안의 본질이 그 자체로 지옥이지 싶다. 그러니 성도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면서도 잔혹한 일인가! 그 끔찍한 자신의 몰골을 하고도 주의 은혜 아래 거할 수 있다니 말이다. 정말 철면피로 완악함의 극치이거나 말 그대로 넘치는 은혜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빛 가운데서다. 다윗이 그때 암논을 정당하게 징계하고 훈계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왜 저는 슬퍼하면서도 방기한 것일까? 우리는 사랑이라 말하고 성경은 죄악이라 칭한다.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 81:6).” 삶이 참 고단하다. 나는 부르짖는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7).”
아!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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