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20
주신 날, 그 처한 상황 속에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게 섬김이다. 이를 개선하고 타개하여 새로운 날들을 만들라고 주의 능력을 주신 게 아니다. 모든 상황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 의도하시는 바,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것이 참으로 귀하고 복된 사명이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리 되어서 그러는 나를 나 역시 종종 어리둥절해할 정도로, 주의 인자하심은 참으로 귀하다.
그 처한 상황이 수단이 되어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이다. 아이들을 놀리는 말처럼, 외롭지 않고 어떻게 글을 쓰겠으며 혼자가 아니면 어찌 책을 읽겠나! 내게 두신 어려움이 주를 바라게 하고 나의 궁핍과 모자람이 주의 은총을 갈구하게 하는 발판인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몸이 병을 이기는 것이고, 도덕적이라는 것은 양심이 갈등을 견디는 일이고, 덕이 많다는 것은 그렇게 쌓아온 양심이 여러 겹 축적되었다는 소리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다는 것은 평소에 잘 몰라도 어두워지면 빛이 나고, 저항이 심하면 거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장을 읽으면서 그 엄청난 복된 비밀을 알 것 같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이다. 누구를 마주하고 어떤 이를 생각하고 저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과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동역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
내게 두신 한 날의 수고와 애씀이 괜한 게 아닌 것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 안성맞춤한 날들로 지금은 은혜의 때이다. 구원의 날이다. 처한 상황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직분에 거리낌이 없게 사는 일로서 하루하루의 날이 값진 것이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3).”
그러므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 많이 견디는 일에서부터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버틸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다(4-8).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하든 주께만 집중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가끔은 나를 김새게 하고 맥 빠지게 하는 것은 이를 알지 못하는 친구의 말 한 마디다. 모처럼 친구들과 전화를 하게 될 때, 어찌 지내는가 물으면 늘 저들은 나의 지금은 안타깝게 여긴다. 동정하고 안쓰러워한다. 딱하게 생각한다. 왜 그러고 있나, 싶은가보다. 그러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9-10).”
아이가 휴가를 받아 인사를 왔다. 무엇보다 군대에서도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가 물었을 때, 네! 그럼요! 하고 아이가 대답해주어 기뻤다.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애인 생기고, 직장 얻고, 결혼할 때, 이는 마치 장애물경기처럼 신앙을 잃곤 한다고 말해주었다. 부디 하나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믿음 잃지 말고 주께 귀히 쓰임 받는 주의 일꾼이 되기를 당부하고 기도하였다. 함께 점심을 먹고 당구도 치고 하는 동안 나는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생각하였다.
늘 나는 실패하는 자 같으나 성공하는 자였다. 수확이 없는 것 같으나 결실이 많았다. 보잘것없는 자 같으나 귀하였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으나 막중한 일이었다.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 이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9-10).”
그러니 하나님의 암호는 어려움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4:8).” 신기하지? 다들 나보다 낫고, 더 많이 가졌고, 하는 일도 귀한 것 같은데 듣다보면 앓는 소리뿐이다. 죽지 못해 사는 듯, 죽겠다 죽겠다하면서 그런 이가 나를 안쓰러워한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암호가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순종이다. 무던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것은 단지 늙어가는 육신의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어린아이 적의 일을 버리는 것처럼, 더는 관심이 없어지는 육의 일이다. 더 좋은 차, 괜찮은 성공, 사람들의 호응과 저들로부터의 인정, 그 가치의 기준이 낡아졌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었다. 친구와 통화하면서 나에 대한 저의 염려가 더는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다. 말을 보태지 않고 무엇을 덧붙여 설명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토록 전에 가졌던 관심은 차츰 사라지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하나님의 암호에 집중하는 일. 아이를 앞에 두고 주의 뜻을 일깨우고 그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일. 당구를 치고 바로 집에 돌아가 귀대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아이와 함께 한쪽 자리에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그럴 수 있는, 그래야 하는 일이 나의 막중한 의무가 되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아이가 어디서 혹은 삐끗 넘어질지, 또는 흔들려 주를 멀리하고 교회를 등지게 될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여기, 오늘에 '너와 나'로 함께 하실 때 내가 할 일은 충성이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렇게 함축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내게 주시고 나를 여기에 두신 것이다. 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 곧 내가 할 일은 여호와를 송축하는 일인 것이다. 이래봐야 뭐하나 싶게, 아이들이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더는 손이 닿지 않을 수 있다 해도 그 일을 염두에 두고 내가 나서서 마음을 부여잡을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 놓아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내 안에 두시는 동안 아이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또 대신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내게 두시는 보물이었다. 내가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있는 마음은 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17-18).” 누가 나를 이해하든 못하든, 그러고 있는 나를 안쓰러워하고 한심하게 생각하든 불쌍하게 여기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내 안이 그리스도의 영이 저희까지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간섭할 필요도 권리도 없다. 이처럼 오게 하시고 붙이셔서 나로 하여금 위하여 생각나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으로도 족한 일이었다. 내 분에 넘치는 사명이었다. 아이와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지점이어서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생각하였다. 굳이 그럴 거 없다. 안타까우면 위하여 기도하면 될 일이고, 그 아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고 지내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실 것임을 안다.
다만 ‘이 아이’ 지금 내 앞에 두신 이, 일, 사건, 상황 들이 사명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나에게 두시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하나님의 일에는 먼저도 나중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곧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그러라고 오늘 내게 오늘을 맡기시는 것이었다. 그 능력이 내게 주어졌으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에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 20:34).”
눈을 떠야 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내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였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 곧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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