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전봉석 2018. 3. 15. 07:28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편 101:1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다. 기도는 그 최선의 증거다. 그럼에도 얼마나 수시로 회의가 드는지.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 때론 어떤 상황에서 또는 암울하여 ‘뭐라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세요.’ 하는 정도의 기도밖에 드릴 수 없을 때가 있다. 아이에 대해, 조울증인가? 아이엄마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감정기복이 심하여 어찌 주체할 길이 없다. 여느 학원에는 견디지를 못한다.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들으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하는 심정으로 주께 의뢰하게 된다. 실제는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나는 얼마나 자주 이와 같은 기도를 올리곤 하는지. 그럼 예수님은 정정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23).” 더더욱 모를 일이다. 나는 재차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못하였나이까(28).”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기도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또 ‘저런 아이’를 붙이시는 것일까?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님을 이제 아내와 나는 잘 안다. 하지만 때론 감당이 안 돼 그저 쩔쩔매기 일쑤다. 어찌하여 우린 능히 못하는 것입니까? 하고 여쭈면,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더욱 주께 집중하라는 말씀뿐이다.

 

꼬맹이들 수업에서 한 녀석이 가슴을 툭툭, 치며 답답해했다. 가끔씩 이래요, 숨을 못 쉬겠어요. 아이의 말에 나는 질겁했다. 전에 아내에게 들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아빠 자리에 다른 아저씨가 들어와 사는 아이였다. 엄마가 웃으니까 좋기는 한데, 아저씨를 좋아할수록 아이는 아빠에 대한 죄책감이 든다. 미안한 것이다. 아저씨는 컴퓨터도 사주고 용돈도 잘 주고 무엇보다 엄마를 웃게 해준다. 일요일엔 다 같이 자전거도 타러 간다. 남들은 아저씨가 아빠인 줄 안다.

 

나는 아이 곁에서 슬그머니 하루씩 더 오겠니? 하고 물었다. 글도 쓰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자면서, 여자애들이랑 같이 하니까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아이가 결정하게 하고 필요하면 엄마에게도 물어보고, 다른 요일 날 혼자 와서 글쓰기를 하자고 권하였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주께 엎드린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24).”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 모든 일이 어제 묵상하였던 변화 산에서 내려오면서 바로 생긴 일이다. 그처럼 좋고 좋은 곳에서 억지로 끌어내리시더니 맞닥뜨리게 하시는 일이 ‘귀신 들린 소년’을 마주하게 하시는 일이다. 그저 아, 좋다! 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그에 따른 여러 믿음의 위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만족스러워하는데, 그럼 또 어김없이 삶의 현장 한복판으로 잡아끌어내신다.

 

뭐라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소서. 하던 나의 기도에서 기어이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로 바뀌기까지. 나는 왜 능히 할 수 없는 것입니까? 하고 여쭐 때, 기도밖에는 방법이 없다. 하고 일깨우신다. 내 앞에 어떤 문제를 두시지만 정작 그 문제 너머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당장 어디 몸은 아프고, 현실은 쪼들리고, 아이들은 하나 같이 이상하고,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단 소릴 하지 않는 세계에서, 기도 외에는 없다.

 

누가 표현한 말처럼 ‘영적인 능력은 내려놓는 것이다.’ 주께 맡기는 일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께만 집중하는 일이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는 얼마나 아둔해 보이는지 모른다. 이보다 어리석은 말도 없는 것 같다. 팔자 좋게 기도나 하고 앉아 있으면 일이 되나? 당장에 뭐라도 해봐야지! 왜 그러고 있어? 하는 소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다. 그러니 뭐라도 한들. 아이를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려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아이의 조증은 이제 엄마로서도 주체할 길이 없다.

 

기도한다는 건 어린 아이처럼 주께 의지하는 일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능력이 뛰어나 더 많은 일을 성취한 사람일까? 그 공로가 대단하여 가히 업적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이 큰 자일까? 아니다. 비로소 주 앞에 엎드려 아뢰기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하는 일이다.

 

그러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어린 아이 같은 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그러게.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주 앞에 나아간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 문제 그대로 주께 기도할 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내 안에서 생수의 강이!

 

티내고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애써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무던하여서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할 때 그 능력은 능히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 역시 늘 힘에 겨워 안정제를 복용해야 하는 처지이면서도 ‘그런 아이’와 또한 숱하게 잠정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마주대하게 하시는 것이다. 헌신이란 결코 눈에 띄는 게 아닌 기도의 영역이었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게 나와 하나님과의 공모였다. 내가 저 아이를 생각한다. 저 아이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하여 기도한다.

 

변화 산에서 내려온 베드로는 한참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단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친히 본 자라. 나를 어떻게 돌이키셨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를 몸소 체험하고 이끌려온 자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7).”

 

이제 내가 주목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더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문제 너머의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8).” 내가 주만 바랄 수밖에 없을 때 나로 하여금 그처럼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신 이가 알려주시는 말씀이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19).”

 

더는 빛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며 어둠을 놓아두신다. 나의 참된 가치는 칠흑같이 어두울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이었다.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두 손 들고 주를 바라고 구할 때까지 하나님은 인내하신다. 막내 제수씨가 단순한 울렁증이 아니라 공황으로까지 힘에 겨워하는 것을 듣고, 나는 안 됐고 안쓰러워서 더욱 주 앞에 앉는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왜 이처럼 연약한 우리에게 이 귀한 일을 맡기시는 것일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므로 나의 약점이 강점이 되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오히려 주께 집중하는 병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더는 다른 걸 자랑할 게 없어졌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인 것 같으나 저 어린아이 하나를 내게 붙이시는 까닭은 그 일이 가장 존귀하기 때문이었다. 빛도 없이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일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것. 아이와 아이엄마가 기도할 줄 모르는 걸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게 하시는 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내가 받은 은혜가 그 무게 추를 이룬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4:17).” 약함으로 담대할 수 있다는 비결이다. 연약함으로 강할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을 때 전적으로 주께 집중할 수 있다.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려고, 심지어 내 의지나 내 수고와 노력도 버려두게 하신다. 의도하는 수고가 아니라, 애써 그리 치우치는 친절이 아니라 내 배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이 있었다. 나도 때론 이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나는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믿으면 믿을수록 나의 믿음 없음을 한탄할 수 있는 거였다. 내가 억지로 어린아이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를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나의 의지로는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알게 하신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3).” 그러므로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오직 주께만 집중하는 일,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