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108:1-2
누구나 자신을 제일 모른다. 늘 자신있어하지만 오해다. 마음먹고, 생각하는 일이야 뭔들 못할까? 그래서 몸보다 정직한 건 없다. 아프면 헉, 소리 나는 거고 못 견디겠으면 살려주세요, 하는 거다. 새로 바꾼 약도 위경련을 일으켰다. 누구는 신경성이라 하고 누군 위벽이 약해서 그렇다고 하고, 누군 약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어찌됐든 아침에 걸어가는 데 훅, 하고 올라와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려 정신이 노래졌다. 몸은 일거의 양보도 없었다. 글방에 올라가 옥수수차를 데워 마시며 진정을 시켰다.
전날에 아이 생각을 하였고 어떻게든 교회로 나오게 하였으면, 하고 주께 바라였다. 오후에는 초등학교 아이들과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었다.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자간과 행간을 구분 없이 읽어 내려가는 것을 다시 천천히 읽게 하였다. 그렇게 읽으면 읽고 난 뒤에도 무슨 내용인가, 남는 게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줄거리 요약을 할 줄 몰라 책을 보고 그 내용을 베끼려고만 했다. 실은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지어보자고 할 거였다. 살아주는 것처럼 구는 아이들의 태도가 마뜩치 않았다.
속에서 이는 마음과 그럼에도 참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언제나 어렵다. 그래도 오전에 일던 위경련이 잦아들어 다행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3월에 내리는 눈은 구질구질하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어둑해지는 실내에 혼자 있었다. 어제 그 아이가 자꾸 생각이 났다. 저마다 안고 사는 어려움의 몫으로 주를 바란다. 주를 바랄 때 그 값어치는 값진 게 된다.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이처럼 내가 보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가 듣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품고 사는 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순종은 순응이고 순응은 주의 도우심을 바람으로 묵묵함이다. 어렵지 않은 게 아니라 어려워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내려놓기까지, 주님은 베드로를 기다리셨다. 주를 모른다, 하고 세 번 부인하고 도망치는 자리에까지다.
우리 의지로는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어림없는 일이란 걸 말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아이들에게 주일을 권할 때 저들이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어떤 흥미나 재미가 아니면 관심도 없는 것에 대하여, 숱한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아왔으나 저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3년을 같이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다를 게 없었다. 성령이 아니시면 안 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바라고, 주가 이루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에게 실망하거나 화를 낼 일이 아닌 것이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 부모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은 온통 하나님 없이 멋대로 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죽어도 자신의 주권을 내어주기 싫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나야말로 은혜가 아닌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 책무에서 충실하게 하시려고, 곧 내가 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포기하기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 몸이 내게 띠 띠운다. 어떤 어려운 형편과 사정이 나를 띠 띠운다. 어떤 아이의 일이 또 말씀이 나를 띠 띠운다. 띠 띠워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그러니까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그런 거였다. 안 믿는 가정에서 그 부모의 불신앙으로 자란 아이들의 탁한 영혼을 맡아야 하는 일. 그 일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짜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 그럼에도 아이들을 또 권하고 다시 마주하면서 어르고 달래 주 앞에 세워가는 일. 예배 끝나고 이번 주일엔 피자 먹으면서 영화보자, 할 때 아이들은 마지못해 그래주는 일처럼 여길 때의 불쾌함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게 궁극적으로는 주를 알리는 일이다. 저들로 주를 알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기쁨과 다르다. 그 은총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 말로는 뭔들 못할까?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21:16).” 비로소 말씀하신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말이다. 어렵고 곤란할 땐 너무하시는 것만 같아 서럽기도 한 것이다. 시시각각 바뀌는 마음이라, 나는 이제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결국 나를 붙들어 세워야 하는 일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얼마나 불쌍한 일인지. 오늘 본문의 다섯 처녀는 기껏 등불을 들고 기다린답시고 가다리다 막판에 그게 웬 일이람!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깨어 있다고 해서 나의 결단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 때, 채우고 또 채워야 하는 게 따로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1-2).”
가만있는 게 아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는 일이다. 나의 비파와 수금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눈은 이쪽에 두고 걸음은 저쪽을 가는 일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겠다. 나의 생각이 온통 아이들에게 가 있게 하시는 건 그 때문이었다. 마음이 자꾸 어제 왔던 아이에게 기우는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저들을 붙들고 위하여 마음 쓰고 기도하게 하시려고. 분명한 건 이게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비로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하는 고백으로 살아드려지기까지. 얼마나 숱한 날들을 배회하고 떠돌듯 방황하며 괴로워했던가. 그러는 아이들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 돋보기를 들이댄 것처럼 크게 보이는 이유였다. 가장 척박한 영혼의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말이다. 저 혼자 어찌 주 앞에 나올 수 있겠나.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그 일을 하는 일원이 돼야 한다. 누군가 날 위해 늘 기도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에 마리아를 보내신 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보내셨다. ‘가서 말하라.’ 내게 무얼 해주신 것을 붙들고 살려니까, 막상 똑같은 일에 서면 또다시 망설이는 것이다. 주님은 간증을 들고 서게 하신 적이 없다. 주님을 보고 서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온전히 주를 바라본다는 일, 그러는 데 있어 나의 연약한 육체가 또 어려운 처지가 오히려 아이들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주께 바라는 데 유용하다고 여기시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강함으로 삼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연신 무얼 더 바라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는 것이다. 나의 약한 데서 주의 온전하심이 담긴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다시 읽는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주가 쓰신다. 쓰실 만한 때에 찾으신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고작 아이들이라니! 했다간 큰일 날 일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깨어나자. 깨어 있자.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2).” 내게 두신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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