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권능의 날에

전봉석 2018. 3. 24. 07:24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태복음 27:51-5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너무하다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자신들의 신념으로 또는 의지나 수고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주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우리의 이해를 능가한다. 주께서 친히 나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곧 하나님 앞에서 걸림이 없는 삶을 살기란, 내가 잘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언제든 돌변하여 ‘더욱 소리 질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고 부르짖을 위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의구심이 오히려 낭만적일 정도다. 기어이 주는 죽으셔야 했고, 저의 죽음은 하나님과 나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미 죽은 몸은 살아나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거룩을 보여야 한다.

 

늘 오늘 본문은 먹먹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은 오히려 순박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그보다 더할 수 있는 게 우리 사람이라. 그 죄로 인하여 예수께서 죽으셨다. 기어이 죽으셔야만 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

 

거룩이란 하나님이 나를 흠 없이 보전하시는 것이다. 그 의는 믿음의 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6).” 곧 예수를 믿음으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러므로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1).” 내가 나를 자랑할 게 없는 만큼 주를 자랑하는 것이다. 찬송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처음 의도했던 구상은 뒤집어져 전혀 상상도 못했던 말씀의 의미로 이끄실 때는 놀랍기만 하다. 나는 솔로몬이 구하였던 ‘듣는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그 이해를 이끄실 줄은 몰랐다.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소리치며 예수를 죽이라 하던 많은 이들이나, 이를 선동하는 자들이나, 십자가 위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나, 안타까움으로 멀찍이 따르던 마리아 일행이나.

 

초자연적인 은혜와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이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나는 부끄러운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니, 주의 사랑이 참으로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의 남은 일은 이를 내 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12).” 주를 흥얼거리고 주를 노래하며 주를 흠모하는 일이다.

 

곧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나를 오늘에 두신 까닭이겠다. 말씀을 묵상할 때나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면 그 의미는 선명하여서 미처 내가 눈치도 채지 못했던 주의 진리를 알게 하신다.

 

솔로몬의 판결은 죄로 어두워진 우리 안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단지 본래의 아기 엄마를 찾아주는 정도의 심리가 아니라, 둘 다 창기였으며 한 집에 살았고 같은 때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놀랐다. 나는 저들 군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빌라도마저 무슨 일인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할 정도의 사람들의 돌변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지 않던가? 나는 원고를 작성하면서 ‘듣는 마음’을 갈망하였다. 내게도 주소서,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들려지는 소리는 이미 더하여진 마음이었다.

 

곧 하나님의 제일 되시는 뜻은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그러기 위해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많은 이들의 조롱과 그 끔직한 고통을 당하셨다. 이는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4-6).”

 

오늘 이 아침에도 주는 물으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어디 아프니 좀 낫게 해달라는 소리였고, 형편이 어떠하니 어떠하기를 바라는 푸념이었고, 날마다 누구처럼 세상 저 많은 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하던 것이고, 나름 인정받기를 바라던 게 아닌가? 십자가에 달려 주님은 물으신다. 네게 무엇을 줄꼬? 여기서 나는 내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구해도 되는 자였다. ‘너는 구하라.’ 하시는 그 대상이었다. 이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를 고하는 데 있어 그 마음의 중심을 살펴보았다. 먼저는 ‘존경과 존중’이었다. 저는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받들고 섬겼는가를 잘 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또한 어떻게 저를 존중하시며 위하여 높이셨는가를 말이다. 그런 자의 고백은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진술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늘의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라. 나는 ‘창기’로 저들과 ‘한집’에 살았고 같은 때에 얻은 ‘아들’로 즐거움을 삼고 만족하던 삶이었다. 나는 결코 누구와 견주어 저보다 나아서 의인이 된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오늘 내게 주신 은혜는 헛되지 않다. 이를 바로 알 때, 겸손을 체득할 수 있다. 꾸며서 그리 겸양을 떠는 게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내가 아는 나의 부끄러움이다. ‘종은 작은 아이라.’ 솔로몬의 고백이 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저 한낱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인 것을.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이처럼 말씀으로 인도하실 때에 내 안에 이는 놀라운 변화는 참으로 신기하다. 이 또한 내게 두신 특권이라. 내가 만일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처럼 말씀을 따라 말씀이 이끄시는 맛을 알기나 했을까? 어깨는 아프고 엉덩이는 뻐근하며, 누가 자꾸 와서 말을 걸고 중간에 또 밥도 먹어야 해서, 산만하고 정신없고 고단한 일인데도!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하고 주 앞에 아뢸 수 있는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게 아니겠나? 이로써 나를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일은 아주 오래 전 너무 정교하게 계획되고 예정된 일이어서 놀랍다. 어쩌다 문득 그리 되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이내 나로 하여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묵상을 하고 이를 글로 쓰면서. 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를 생각함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고 바라게 하시려고. 아직 알지도 못하는 이의 영혼을 두고 성령이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처럼 나 역시 저를 위해 주께 간구하게 하심이었다.

 

들음은 단지 귀로 듣는 그 이상의 의미다. 들음은 스밈이고 스밈은 그 자체로 하나가 되는 일이어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오늘 아침, 이 말씀이 본문의 내용을 축약한다. 주께서 누구에 의해 팔리시고 넘겨져 조롱과 멸시와 고통을 당하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나를 오늘에 세우실 때 기쁨으로 설 수 있게 하신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말씀의 선포가 오늘의 나를 여기에 서게 하셨다. 그러니 두려워할 거 없다. 주는 나를 붙드신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심으로 그것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하게 하심이다. 우리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이런저런 어려움과 모진 시간들 가운데서도 어찌 설명할 길 없는 평안이 내 안에 충만함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듣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고, 이는 나의 마음을 또한 생각을 저 아이에게 내 곁에 두시는 이에게 내어주는 일이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내 안에 스민 들음이다. 믿음인 것이다.

 

아, 그리하여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