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전봉석 2018. 3. 25. 07: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시편 111:7-8

 

 

 

 

사실은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 여기거나 그렇게 여지기 않거나, 받아들임의 문제다. 사실은 상식으로 이해거나 계시로 이해하거나 둘 중 하나다. 상식은 감정을 통해서 인지하는 것이고 계시는 믿음을 바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의 설명은 이론이 된다. 이론에 맞는 가정을 세워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정반합을 이룬다. 사실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이다. 인정하지 않음으로 영향을 받거나, 인정함으로 영향을 받거나.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에는 증명할 수 있는 사실보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 더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섣불리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별개다. 감정에 의해 상식적으로 접근해서는 말이 안 되지만 믿음에 의해 계시로 다가오면 말이 된다. 이미 저의 출생에서부터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므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이 간단한 명제 앞에 어떤 가정을 세울 수 있을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하여 내가 어찌 하려는 게 어리석은 일이다. 수업을 삼십여 분 앞두고 아이가 문자를 주었다. 가족 행사가 있어 수원엘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와 통화를 하고 그럼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드리자고 말하였다. 밑도 끝도 없는 권함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믿음을 줄 수는 없다. 다만 전하고 나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아니 되는 일에 대하여는 나로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이의 네, 하는 대답이 고마웠다. 오늘은 무엇을 쓰고 서로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이 싱겁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는지 모른다. 내일 와. 했더니, 예배요? 하고 묻기에, 응! 하고 답하였다. 다른 말은 소용이 없다. 토요일에 그렇듯 아이가 오지 못하게 되자 알 수 없는 서운함과 허전함이 느닷없었다. 연애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아이를 생각하고 이를 주께 아뢰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상식적으로는 저 애가 오고 안 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이제 내가 아는 사실은 계시의 영역이다. 그리 여겨지고 열어 보이는 일로써 마음이 그리 주장하는 믿음이었다. 글방에 아이가 안 오는 일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그런데 주일에 나오길 바라고 구하던 아이에 대해서는 자꾸 마음이 쓰이고 아프다. 고통이다. 고통은 새로운 내 몫의 아픔이다. 내가 왜 이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픈가,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는 내가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오늘 본문의 부활 사건은 말씀 중에 가장 거칠고 무모한 사실이다. 사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의 언급은 더욱 간결하고 거두절미하다.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지만 사실이라고 증명할 길도 없다.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르신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래서 그리 순종함으로 받아들이거나 이내 회의하다 의심하고 인정하지 못하거나, 이는 엄밀히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누구는 그리할 수 있고 누구는 그리할 수 없다.

 

여러 번 권하고 또 성경공부까지 하여 세례도 받았음에도 멀리 떠나 있는 아이의 경우에 대하여는 너무 애태우는 마음을 접기로 했다. 듣지 못하고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여전히 주님은 우리 곁에 두시니까 말이다. 새로운 아이가 내 안에 가득 차는 경우여서 우리는 저들로 예배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은 그만큼 가치 있다는 소리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일과 같다. 나는 믿음을 줄 수 없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다. 결과론적인 일이지 처음부터 믿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그러다는 지레 내가 회의론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래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어떤 언변과 선행으로도 저에게 믿음을 줄 수는 없다. 죽었던 예수가 살아나셨다. 이를 알리기 위해 창기였던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알린다. 저들에게 소요가 일면서 누구는 동조하고 누구는 의아해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기어이 주께서 저들 앞에 나타나심으로 가능한 일이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직접적으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로 그 앞에 예수께서 죽었다 살아나셨음에도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지경인데! 나 역시 상식으로는 이를 알거나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리 여겨지는 마음으로 왜 그리 여겨지는 지는 설명할 길이 없는 믿음에 대하여, 나는 아이들 앞에서 삶으로 이를 증거하고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일은 그리 알고 나를 맡긴다는 일이기 때문이다. 맡긴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차원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증명된다. 그 외에 다른 것을 더는 신뢰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으로만 충만한 삶이다. 나의 남은 생애가 그 너머의 영생의 일까지, 맡김으로 나의 전부랄 수 있는 모든 걸 거는 일이다. 내가 그리 확신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리 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느닷없는 감정, 아이가 오지 못하게 됐다는 말에 내 안에 이는 서운함이 연애하는 사람의 감정 같아서 나는 속상하고 서운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를, 더는 예배를 아예 멀리하는 아이를 생각할 때 가슴이 철렁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가슴이 먹먹하게 저려오는 것에 대하여 나의 상식은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 자고로 사람이란 그런 것이어서 어떤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굳이 자신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거듭남은 내가 이뤄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의 것이다. 성령이 오셔야 이를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그럼 성령을 구하는 것뿐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점심나절에 사무실 ‘아버님’이 와서 같이 차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맞춤하니 장모가 뒤미처 오셔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슬비에 속옷 젖는 것처럼 나는 안 믿는 이에게 믿음의 사람으로 응하고 취해야 할 답을 찾아 구하였다. 이런다고 무슨 소용이나 있겠나, 싶은 것들에 대하여 말씀은 분명히 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나만 모호했던 건 아니다. 다만 믿음뿐이다. 성령이 하실 것에 대하여 말이다.

 

부모 사이가 그렇고 언니와의 관계도 그런데 가족 행사로 할머니 뵈러 수원에 간다는 말에 손가락 끝의 거스러미처럼 나는 자꾸 아이 생각으로 신경이 쓰였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마음이 쓰이는 까닭은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신호와 같다. 나는 이제 그리 여기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예배에 나와라. 오고 안 오고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어서, 나는 다만 성령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궁금해 하였다.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아서 말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러니까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바라고 구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내 일이 아닌 것이다.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나의 사소함으로 내 마음을 주께 아뢰며 아이를 생각할 뿐이다. 아이들이 영화를 보러 오든, 피자를 먹으러 오든, 나는 저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서면 그뿐이다. 능히 거침이 없게 하시는 그 영광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만 주목하는 일이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선포 후의 일에 대하여는 성령이 저들 가운데 역사하실 일이다.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시 111: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