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33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편 140:12
손에 든 쟁기를 내려놓는 일은 자기성찰보다 어렵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당장 불안해서라도 이것도 놓지 못하고 저것도 붙들어야 할 거 같은데, 그러할 때 문득 드는 생각이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이 말씀은 스스로 불구의 길을 택하는 것과 같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남들은 기를 쓰고 더 나은 쪽을 구가하며 그 진가를 발휘하고 싶어 하는데, 이를 내려놓는 일이 어떻게 자기성찰 정도의 맥락에서 가능한 일일까. 안 된다. 안 되니까 안 되는 자신을 두고 주 앞에 엎드린다.
결론은 내가 내 의지로 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쉽지 않은 일이다. 든 게 많으면 근심도 많은 법이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혼자 들어앉아 이것저것 없어서 쩔쩔매다가도 없음으로 주의 이름이 간절하였다.
주인이 와 누가 우리 방을 썼으면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옆에 비어있는 곳보다 아무래도 좋아보여서 그런가. 그러저러 해서 우리더러 옆방으로 옮겼으면 하는 것인데 그러자고 했다. 누가, 어떤 업종이 들어오려는가. 마음이 쓰였지만 주님이 하실 일이다. 주의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가장 합당한 게 아니겠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으나 말로 하지는 않았다. 다들 처한 상황에서 암중모색 사느라 전전긍긍인데, 나만 태평한가 싶었다.
그러니 누가 알까. 실내 인테리어를 몇 천씩 들여 공사를 하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적자로 허덕인다. 사느라 드는 비용이 과하면 또 그만큼 죽어라 하고 살아내야 하는 일이 는다. 그런 삶을 두고 성경은 잘 살았다 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손에 든 쟁기를 내려놓으라 하니,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를 어찌 구할까? 다시 또 옆방으로 옮겨야 하고 그러자면 와서 도와줄 아이들이 몇은 있어야 할 텐데. 나 역시 왜 이런저런 고민이 없겠나. 그러면서도 확실히 달라진 것은, 여기는 교회라.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가시든 주의 것이라. 하는 확신이 더 컸다.
나를 두고 그리 생각할 때 그 생각을 훼방하는 것이 신체 건강한 팔다리 때문이라면 잘라내야 한다. 잘 벼린 칼날이라면 무뎌져야 한다. 누가 뭐라는 소리에 너무 애쓸 거 없다. 저들은 내게 고마워라하지만 나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어찌 하시려는가, 주가 이루시는 대로 이끌림이다. 그를 경외함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것으로 들으심을 얻는다. 모두는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릴 위해 주님이 기도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그러는 게 여지껏 나의 삶이었다는 것을 잘 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종교를 운운하며 교회 나오기를 꺼려하는 아이를 나는 어찌 대해야 할까? 자신이 없어 주께 자꾸 아뢴다. 같은 곳을 보고 가자는데 서로를 보자고 하면 그 시선은 금세 질려 실망뿐이다.
사람 다 그렇다. 주인은 사정 이야기를 하며 양해를 구했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리하자고 하였다. 그게 또 나은 것이다. 내 것으로 나의 손에 든 쟁기로 일구는 일이라면 그 또한 부당한 것이겠으나, 주께서 내 안에 이루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1:12).” 이는 내 손에 든 쟁기를 내려놓는 일이다.
그러할 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 주께서 이를 내 안에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 그럴 수 있기를 또한 주께 아뢴다. 나의 아뢰는 이 기도가 노동이었다. 수고였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나를 짊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저들의 삶과 내려놓음을 위해 싸우는 나의 일은 같지 않다.
전적인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는 것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신자로의 구속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물이겠으나 주의 제자가 된다는 일은, 이루어야 하는 일이다. 주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그와 같은 결연함이 어찌 나의 것이겠나. 이 불가항력적인 이끄심이 또한 주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1-12).” 상호 붙들림 바 된 것으로, 마치 믿음과 행함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말이다. 싫으면서 좋은, 불편하면서 괜찮은, 성가신데 그러고 싶은, 나의 이 아이러니한 마음을 말씀이 이해하게 하신다.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게 하시는 일. 그러므로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그러므로 나는 없는 자 같으나 있었고, 미련한 자 같으나 은총을 입었고, 물러터진 자 같으나 단단하였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조금은 복잡한 심경과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였으나 그래서 그것으로 주를 바랄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종일 비가 내렸다. 실내는 어둑하였고 나의 사지육신은 쑤셔댔다. 그런 내게 주의 은혜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7).” 살 수 있는 특혜다. 곧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8-9).”
이로써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자부하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교회를 주가 이루고 계시다는 일이다. 아무런 성과도 변변한 나음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나, 하루에 몇 번씩 내 안에 드나드는 아이를 두고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내게 맡기신 사명이지 않겠나.
그러니 하시는 말씀이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생각하는데 한 술 더 떠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 자기 십자가라! 이를 바로 이해하는 게 은총이었구나. 단지 나의 지지리 궁상 나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여기가 교회인 것과 이를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아는 관계로 나는 나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왜 또 이사를. 누구 편의를 봐주느라 왜. 귀찮고 성가신 일인데.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 가시는가, 되레 궁금한 것이다. 그래도 되는, '호구'가 되어주는 일.
정작 주님은 그럼에도 그런 자들의 알지 못함을 두고 십자가에 달려 기도하신 게 아닌가. 기도보다 더한 노동이, 희생이 또 있을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이 일을 여전히 남기신 거 아니겠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세상 끝 날까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 대신 기도하는 일, 용서를 구하는 일. 그것으로 나의 십자가로 삼는 게 제자의 길이었다.
구속은 아무나의 것일 수 있다면 제자 됨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일이겠다. 그리하여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사느라 쩔쩔매는 운명론적인 고난이나 궁핍이 아니다. 버려두고 주를 따르는 자를 위한 변호다. 그런 와중에도 감사하는 자의 정의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내가 주의 앞에서 정직한 자로 살 수 있는 비결은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인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어서, 내가 이룰 수 없는 일이어서 다시 또 실망과 좌절 앞에서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 이는 자기를 맞추는 일이며,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주가 맡기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 내 것이라 여긴 나의 소유를 버리는 일이며,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그리하여 소금의 맛을 내는 일이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4).”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온통 전쟁이라. 그럼에도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시 14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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