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40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 138:2
두 아이가 백일장에 나갔다. 날은 푸르고 온화하였다. 마음을 쓰면서 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신경이 쓰이는 만큼 주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토요일, 아내는 장모를 모시고 동대문에 갔고 딸애는 약속이 있어 나갔다. 뜬금없이 손위 처남이 주일 예배에 나온다고 하여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한 날의 자잘한 사연과 상황이 주의 손길을 더듬어 알게 하였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씀 앞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 내 안에 일렁이는 숱한 생각과 사연을 주께서 조장하시는 것임을 짐작하였다. 고작 초등학교 5학년 계집아이들에게 먼저 사과 문자를 보내고, 아이들이 이를 받아주고 답해주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늘 늦고 어슬렁거리는 듯 게으른 중3 아이 둘을 얼레고 달래 백일장에 내보내는 일에서도.
주가 두시는 마음이라 그리 짐작하였다. 아니면 내가 이 일을 어찌할까?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일이란, 불현듯 내 안을 꽉 채우고 있는 어떤 마음이었다. 열한 시에 오겠다는 아이가 열두 시가 다 돼 오고, 한 시에는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 혼자 마음이 쓰이는가. 그나마 또 다른 아이는 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어디 전철역으로 직접 가겠다고 하니. 이게 다 내 맘 같지 않은 것이라, 그럼에도 주의 마음으로 대하여 이르는 일.
주께서 내 안에 형성되신다는 일은, 그 은혜를 알게 하시는 거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나는 권하고 전하여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이를 또한 함께 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이를 내가 어찌 알까? 나의 이성이 미처 깨닫기 이전부터 성령은 나의 마음을 주장하고 계신 것이다. 이끄심이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주가 임의로 하시는 일이다. 아니, 나의 육적인 마음이 동의하지 못하나 영적인 마음이 그리 쏠리는 것이어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 내가 나 자신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신다.
손위 처남이 장모를 모시고 주일 예배를 우리 교회에 와서 드리겠다고 할 때의 어떤 떨림에 대하여,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그래,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나의 간구에 주가 응답하신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내가 열심을 다해 수고하는 결과가 아니다. 다만 나는 묵묵함이라.
하기 싫을 때, 또는 어려워 몸도 마음도 시달리고 있을 때,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 말씀만 의지하여 주 앞에 서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를 짐작하여 무엇을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두시는 대로 그 마음에 순응하는 일. 그것으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삶이다. 그럴 수 있는 비결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그렇지! 내가 이 아이를 생각하고 저 일을 마음에 담아 씨름하는 까닭은, 그것이 오늘 내게 두신 보물이라. 꼬맹이 어린것들에게 휘둘린다고 아내는 뭐라 핀잔을 주지만 마음이 자꾸 쓰여 못살겠어서, 걔들이 나를 어찌 생각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나로 인해 교회를 또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갖게 될까봐. 그리 마음이 자꾸 쓰이는 게 보물이지 않겠나.
은연중에 판단하고 가늠하여 어떤 가시적인 것에 눈 먼 세상에서 고작 아이들의 마음이 또 주를 바라는 그 자리에 대해 나는 자꾸 신중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같이 무얼 먹을 때, 또 아이를 백일장에 내보내기 전에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아멘을 하지 않는 아이 앞에서 나는 머쓱하고 계면쩍은 일임에도 내가 저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주께서 하지 않으시면 얘가 여기 온들, 내가 천사의 말을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이것이 또한 나를 늘 준비시키는 일이겠으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 그게 언제일는지 또는 이 아이를 통해서일는지. 그러므로 나는 다만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할 따름이다. 예배란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주의 성실하심으로 주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저 아이는 또 이 상황은 주가 다 아시는 일이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 12:6).” 하물며 이 귀한 사역 앞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란 주의 말씀을 붙들고 서는 수밖에.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
저 아이가 어찌 생각하든, 기어이 자기 부담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떨어져나가든,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 내 안에 두시는 성령으로 나는 나조차 주체할 수 없는 일이다. 주가 일하신다. 그 증거로 저 아이다. 지금 내 심정이다. 어려움이다. 오늘 이 환경이다. 증거는 따로 필요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2).” 늘 돌아보면 송구하고 죄송한 일뿐이나 심중에 생각하는 그 모든 걸 주장하시는 이시다.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게 사람이라.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늘 보면 내가 나한테 배우는 일이다. 내가 나를 능히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내가 저 아이를 어찌 이끌겠나.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하지만 죄는 창조된 게 아니다. 이어져 몸에 밴 것이라 이와의 다툼이 현실이다. 아이들도 자기가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니, 뭐라 나무라고 야단치기에 앞서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주가 이루신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오늘 말씀 앞에 붙들린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32).” 내가 할 것은 다만 준비하는 것. 이로써 천국에 쌓는 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33).” 아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니 그 모든 일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이내 내 마음이 거기 두심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주께서 그리 하신다. 그러므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싶고.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답답하기만 해도. 고작 이 어린것들로 신경 쓰이고 마음이 저 혼자 어려워 쩔쩔매는 일에 대하여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다. 그리 마음을 두게 하시는 이가 보물이다. 곧 나를 살리는 영이시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이 영의 속성은 땅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46).” 주만 바란다는 것. 주를 의지만 한다는 것. 이것으로 다른 데 정신 팔리고 마음 두지 않는 것이 보물이었다. 내게 두신 저 아이를 향한 마음이 말이다. 말씀을 붙들고 나를 자꾸 주 앞에 바로 세우려는 일이 말이다. 몸은 여의치 않고 나의 불안증은 저 혼자 속 끓이며 고달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붙들려 있는 마음으로 이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었으니.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이를 온전히 믿기까지 나를 자라가게 하시려고, 온통 나의 화두는 아이들이다. 생각은 그리 향하여, 주를 바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봄날이 주의 것임을 알게 할까?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마음은 저 혼자 쓰이고 쓰여 쓸리다 아파 신음하지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42-4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 138: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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