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전봉석 2018. 5. 3. 07:26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누가복음 23: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편 149:4

 

 

 

유명 배우와 가수가 어디서 성경공부모임을 하다 구설수에 올랐다. 저들이 구원파니 아니니 하는 소리가 종일 검색순위를 채우고 있을 정도였다. 구원파는 권신찬에 의해 그의 사위 유병언으로 이어져 그 세를 불렸다. 세월호 해운의 사장이기도 한 유병언을 성령으로 내세웠고 급기야 메시아로 보았다. 저들은 성경을 풍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깨달음으로 구원을 도모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더는 죄로부터 자유롭다.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풀려난다. 별도의 회개와 기도가 필요치 않다.

 

기성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주일 성수나 십일조, 예배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성도를 괴롭히는 십계명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이와 같은 예속에서의 해방, 구원을 이루는 깨달음은 영과 육의 이중구원으로 나뉘어 이룬다. 스스로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고 단번에 영원히 용서됨을 깨닫는다. 구원 이후 죄를 짓지 않고 그 죄책에 대해서도 억압받지 않는다. 지역교회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중심의 국가교회를 선호한다. 성도의 교제를 예배의 중심으로 놓는다.

 

누가 육성으로 자신의 간증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지도하는 것을 들었다. 마음이 어렵고 답답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내용으로 아이들의 마음이 더욱 무관심해질 것 같아서였다. 신기한 건 그와 같은 교단이 세를 불려가고 많은 사람이, 특히 유명인들이 몰려 그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궁금하고 어느 배우 때문에라도 관심을 갖는다. 다 그렇지 뭐, 하는 회의론과 맞물려 오늘 본문은 그 의미를 시사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희한한 일이다. 헤롯의 관심은 또 어떤가?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8).”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겸하여 섬기는 일에 대해서다. 당시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예수의 말씀도 듣고 저의 병 고치심도 보고자 해서 말이다. 헤롯과 같이 기뻐하였다. 이는 소문으로 들어 보고자 했고,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다.

 

하루 종일 마음이 착잡하고 어려웠다. 다들 저마다의 이유와 고집으로 주를 바라거나 외면하거나, 궁금해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특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에 어느 아이가 물었던 것처럼 같은 하나님 아니에요? 하는 식의 이해라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그러니 내가 어찌 맞설까? 아이들을 어찌 붙들고 사람들에게 뭐라 설명을 해야 할까? 유명인으로 이미 성공에 성공을 거둔 이가 저처럼 간증하며 성경공부를 주도하는데,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나?

 

우리가 흔히 믿고 구원 받았다, 하는 자기 신념이 얼마나 얄팍한지. 이를 확신하여 더는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어떤 죄책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이 얼마나 두렵기만 한지. 나는 내가 아는 구원과 저들이 주장하는 구원이 다른 것이어서 두렵다. 확신으로 치면 저들과 견줄 수 없다. 어떤 성과나 가시적인 삶의 모습으로 보자면 나는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생각에, 이와 같은 기사를 접하면서 어떤 회의가 더욱 무관심을 조성할 텐데. 그러다 전에 어느 아이처럼 무슨 성경공부에 이끌리기도 할 테고.

 

어느 날 한 녀석이 핏대를 세우며 물었었다. 서로 그리 말하는 것이고 서로 그처럼 믿는 일이면서 서로 자신이 옳다 하는 거 아니냐? 저쪽도 성경을 붙들고 이쪽도 성경으로 뒷받침한다. 다들 자기 좋은 것을 취하는 거 아니겠나? 나름 여러 차례 함께 성경을 살피며 말씀을 붙들고 성경공부를 하여 왔다고 했는데, 서로가 이 말이 그 말이고 저 말이 이 말이라고 하니 나는 안 듣겠다, 하며 아이는 떠나갔다. 어제는 종일 그런 착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누굴, 무엇을 어찌 바꿀 수 있지 못함을 주 앞에 고하였다.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 하나 바로 서는 일에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래서 더욱 어느 세리의 기도를 생각하였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고개도 들 수 없고 뭐라 나서서 어떤 단호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도 이루어낼 수 없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죄책을 구렁을 메울 수 없다. 저들의 결연함이 나는 두렵다. 그 확신 앞에 주눅 든다. 당장 죽어도 좋고,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들어갈 천국에 대한 확신이 소름 돋았다. 어느 자폭 테러범의 굳건한 의지를 보는 듯도 하였다.

 

저나 나나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도대체 어떤 깨달음으로 구원의 경지를 삼아 그처럼 확신에 겨운 설파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초딩, 중딩 아이들 몇 명도 당해내지 못해 쩔쩔매는 위인이라 주눅 아닌 주눅이 들 정도이니. 그 율법으로는 단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고 어떤 선행이 또는 자기 확신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마당에 스스로 의롭다하심을 확신하는 일이라니, 결국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그 증거를 받는 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나 그 구원의 증거가 율법에 있었고 선지자들의 증언으로 말미암는 일이다. 곧 우리 스스로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으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이에 저들의 열심과 그 굳건한 확신에 주눅이 드는 게 아니라, 안타까움으로 말이다. 그렇게도 자신은 자신의 믿음에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이처럼 증거 하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와 같은 복음은 어떤 의미일까? 믿음의 또 다른 변이가 신념이다. 자기 확신이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은 물론 강단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그 앞에서 예배하는 교회의 모습이 두렵다.

 

나는 새삼 구원파에 대해 찾아보고 <교회와 이단>을 꺼내어 읽어보면서, 언제든 나의 마음이 또 열심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데 한숨지었다. 결코 나는 아니야, 하는 확신이 들어서면 이미 그 돌연변이는 숙주를 능가한 힘을 갖는다. 그처럼 확신에 겨워하는 게 믿음이라면 바울은 참 어리석다. 그처럼 스스로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킴으로 지키려 했던 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도저히 내 의지와 확신으로는 주를 바랄 수 없음을.

 

종일 봄비가 내리는 어둑한 실내에서 나의 마음은 공연한 것이었을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단지 이와 같은 고백이 어떤 신념과 확신이 덜해서 생겨나는 옹알이인가? 나는 저들의 음성 파일을 열어 들으며 그 확신이 두려웠고, 그 신념이 부끄러웠다. 그만큼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인데, 내게는 여전히 그만한 믿음이 없는 것인지. 나는 다만 죄인 중에 괴수이다.

 

주의 은총이 아니면, 그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이 땅의 문화 사업을 주도하고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여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신앙의 확신이 나는 무섭다. 이상하게 나는 말씀 앞에 서면 더더욱 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며 한 순간도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겠다. 이는 단지 죄책에 의한 자기 환멸이 아니다. 믿음이 강하여지고 자라나 주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의 확신은 보잘것없고, 주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저들과 견주어 누가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오면 나는 내보일 게 없어서 민망하고 송구하다.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내 돈 들여, 내가 사람들을 모아, 내가 성경공부를 한 걸 두고 뭐라 한다며 역으로 고소할 것이라 항변하는 저의 분명함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저들의 예배는 종교의식에서 자유로운 성도의 교제를 운운하며 자신들이 가진 부와 명예를 가감 없이 드러내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라니!

 

공연히 마음이 어렵고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그 밑에 달리는 댓글을 보며 또한 마음을 졸였다. 싸잡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이다. 나는 창가를 서성거리며 알 수 없는 서글픔으로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중3 아이 하나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곧 중2 남자아이가 상담 겸 글방에를 다니겠다고 하여 그 죽고 싶다는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이 많은데, 수천수만 명을 거느린 어느 교회나 무슨 교단의 이념과 신념에 대하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았다. 여기저기서 말하는 구원과 내가 알고 있는 구원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저들과 뭐가 다른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 23:29-30).” 그처럼 확신에 겨운 것인지, 그 괴로움에 치를 떠는 것인지.

 

나는 다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의 비루함을 감사하고 빙충맞고 한심할 정도로 처량하기까지 한 지금의 이 처지를 사랑한다. 주신 바 그 은혜로 족한 삶이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가만히 주 앞에 앉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조용히, 가만히.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