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전봉석 2018. 5. 5. 07:0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에 대하여’ 아는 것과 ‘~을’ 아는 것과 ‘~이와 함께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에 대해’ 아는 것은 간접적으로 아는 정도이고 이는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더는 좁히지 못하는 것이다. ‘~을’ 아는 것은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몸소 체험하고 함께 하는 거리의 정도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하는 것’은 죽으나 사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일컫는다. 아이의 우왕좌왕 하는 말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회피다. 하기 싫은 걸 그리 여러 말로 치장하는 것이다. 무력감을 즐긴다. 그게 너의 특징이다.

 

주일에 교회 와라, 같이 예배드리고 주를 바라며 가자. 아이는 나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나는 보다 솔직하게 말했다. 싫증난다. 잘해주고 싶고 할 수만 있으면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만 곧 우리는 서로 실망할 것이고, 그러다 돌아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늘하게 식을 것이야. 그럼 또 언젠가는 기억조차 희미해지겠지. 사람 관계란 다 그런 것이려니. 실은 너 같은 애는 많았다. 아니, 너보다 더 마음이 끌리고 잘해주고 싶었고 신경이 쓰여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거듭하던 아이도 많았어. 그런데 뭐?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처럼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겠으나, 우리가 같이 신앙으로 하나 되고 같은 것을 바라보며 나아간다는 것은 ‘~이와 함께 하는 것’으로 죽으나 사나 같은 편인 거야. 그렇듯 대놓고 아이에게 말한 것은 밤새 아이 글로 엎치락뒤치락 마음 쓰이던 것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순간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싫증나서 아이를 오래 대할 수가 없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지겹고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였다.

 

내가 아이를 구원할 수도, 구원시킬 수도 없는 데 대해, 그러므로 같이 가자. 이를 예수님은 따르겠다는 두 제자에게 ‘와 보라’ 하셨고,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하였다. 나 역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이었고, 아침에 건너와 차를 한 잔 하던 노인에게도 그리 말하였다. 전날에 ‘나의 이야기’로 인한 것일까? 노인은 다른 날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은밀한 부분까지 들려주었다. 나는 여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조모의 손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는가 하였더니, 부친은 일찍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리고 다른 일가를 꾸렸고, 모친도 뒤이어 어려운 살림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갈보집을 하였다. 둘 다 오십 줄 초반에 죽었다. 저의 고백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주일에 오시라. ‘와 보라.’ 하는 거였다.

 

곧 오늘 말씀이 그 해결책이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령이 이루셔야 할 일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주의 이야기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우리 이야기는 그저 신세한탄에 불과하고 서러웠던 날들의 넋두리밖에 안 된다. 나는 이를 노인에게 또 저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와서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 함께 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하여,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시편이 답하고 있는 듯하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주께서 인정하시는 길이 아니면 그 길이 아무리 탄탄대로라 해도 망한다.

 

오후께 아이와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손위 처남이 전화를 주었다. 요는 매 달 한 번씩은 주일에 우리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려도 되는가, 하는 거였다. 그러시라. 와서 보시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에 대해서도 저 노인의 완고함의 근원에 대해서도, 무릇 주께서 인정하시는 길이어야 했다. 설교 본문으로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나는 나의 믿음이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데 확신을 가졌다. ‘영접하는 자’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의 관계 같은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영접하는 게 아니고 저가 강제하시는 게 아니다. 저의 강제하심과 나의 영접함이 한 이야기로 드러나는 내용이어야 한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겠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믿음이 없어서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했을까?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널 너는 믿니? 넌 너 자신을 이길 수 있니? 난 내가 제일 어렵다. 번번이 난 내게 진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죽는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의심과 환멸을, 혈기와 짜증을, 실의와 낙심을, 원망과 불평을. 쉴 새 없이 이는 우리 안의 쓴 뿌리를 어쩌면 좋을까?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5-16).”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이유다.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그래서 노인은 자신의 억척스러운 삶을 자부하였다. 맨 손으로 일군 이만큼의 생을 업적으로 삼으려 했다. 보배로운 처와 보석 같은 자식들이 제가 일군 것으로 아는 것인지. 태의 열매라, 주가 맡기신 기업이라. 나는 노인의 말을 정정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함께 하신 이가 계셨음을 알게 하고 싶었다. 믿음은 내 것이지만 주의 선물이다. 선물로 받지 않았으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것이면서 결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본질이 ‘진노의 자녀’였음을 안다. 여전하여서 내 안에 이는 ‘상실한 마음’의 무수한 연고를 지니고 산다.

 

아이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가 좋아라하고 오는 글방이, 또한 특이하여 매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글방선생이 실은 다 그 때뿐이라. 곧 싫증이 날 것이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결코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음에 대하여. 그러니 ‘와서 보라.’ 우리 안에 얼마나 끈덕지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집요한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러므로 드는 마음에 대하여는 어찌나 추하고 더러운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볼 때마다 다 내 마음이라. 내 속에 가득한 것이어서 나는 내게 늘 진다. 아이의 말에 고마웠다. 날마다 져요. 자신에게 말이다. 그게 우리의 실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뭐 그처럼 온갖 변명과 핑계와 남 탓을 일삼곤 하는지.

 

그래서 뭐? 나는 다그치듯 아이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만두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더는 오지 않겠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건사할 능력도 안 된다. 와서 보라.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3).” 무르익어 그 마음에 쌓아두고 살았던 서러움과 억울함을 토로한 노인에게 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말하였다. 마나님 교회에 모셔다 드리면서 같이 가시던가, 아니면 여기 오시라. 함께 예배드리자.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이에게 또한 노인에게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을 내가 대신 말하였다. 더 두고 봐야 할 일인지, 끝내 거절하며 마다할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주가 나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는 할 수 없으니 주께서 이루어가시기를. 이를 바라며 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또 혼자 두시고 오래 참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때론 지겹고 억울하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을 것처럼 힘에 겨우나, 그러므로 저 아이의 처한 상황을 그리고 한 노인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을 견디어 온 완고함에 대하여, 그 어쩔 수 없음을 주 앞에 아뢰게 하시는 일이었다.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일은 저의 인생 전부를 맡아서 같이 하는 일이다. 갈보집을 하느라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간 모친에게 조모는 공납금이 없어 고등학교도 졸업할 수 없는 신세를 알려, 모친이 도와준 돈으로 간신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할 때의 그 서러움을 보았다. 울고 싶은 아이 같은 저의 눈빛을 나는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거들먹거리고 옹고집을 꺾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한 죄악의 굴레에 치를 떨었다.

 

와서 보라. 나는 저에게 구원의 티켓을 건네듯 쥐어주었다. 나는 이러저러 하여 어른 성도들이 와서 같이 예배드리는 게 어렵다. 그럼에도 어쩌겠나. 오시라. 함께 가자. 아이에게 저 노인에게 손위 처남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일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내 것이 아니다. 네 것도 아니다. 우리의 특권도 아니다. 특혜도 아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긴다.

 

나보다 미련하고 어리석고 불쌍하고 한심한 인간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서 못 하겠다, 돌아누워 신세한탄을 일삼은들. 그건 그저 회피라. 괴로움을 베개 삼아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잠 6:11).” 어느덧 그 날은 순식간에 닥치는 것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그리고는 어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백 날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이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어야 하는 일이다. 와야 할 사람은 오게 하실 것이다. 나는 다만 여기 있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 그것으로 이미 족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