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편 59:9
억수로 퍼붓는 장맛비 때문이었다. 몸은 힘들고 마음은 어려웠다. 아이는 좀 나아졌는가? 전날에 형 자취방에서 자고 내려오는 길이라며 예배에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더하신 날에 주어진 일을 행할 뿐이었다. 비가 뜸하여 얼른 집으로 올라왔다. 오후 내내 어디가 아팠다. 사느라 드는 어려움이 녹록치 않았다. 덕분에 늘어져서 수발을 들었다. 나는 다만 이 말씀을 사랑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막연한 영혼 구원에 앞서 육신의 구원도 이루신다. 늘 입버릇처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더하여 고백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다른 길이 없다. 나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다못해 주어진 몸뚱이를 놀리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종종 나서는 내 안의 조급함과 어떤 염려가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리 순종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보면, 그러게! 매순간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났고, 그때마다 주의 말씀 앞에 다시 붙들렸다. 만일 자기가 의를 이루려고 하는 거였다면 어찌 주의 의에 복종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곧 수천 년 뒤에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의 의를 저는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저의 독자,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신 후에 그것은 시험이었을 뿐 실제는 아니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리고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 바로 그 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제물로 죽이셨다. 이삭은 구원의 제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아볼 뿐이었다. 저는 그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설령 죽이시더라도 살리시는 분인 것을 말이다. 죽여야 산다는 일은 오늘도 나의 삶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는 일이다. 내 안에 드는 어떤 서러움도 또는 실제 몸의 고약한 고통도 그것으로 주께서 살리시고 있는 일환일 뿐이다.
이를 오늘 바울은 이렇게 정리하였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까지 온 것이 복이다. 약속의 성취인 줄 알았던 독자 이삭까지도 제물로 내어드릴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온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다. 이를 멋진 운율에 담아 다시 음미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그렇지! 마음에 담아 고인 마음은 말로 이루어져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른다. 날마다 그 하루가 모리아 산을 오르는 일과 같은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11).”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우리는 그리스도 이후의 삶을 사는 혜택을 누린다. 아브라함보다는 선명하여서 주신 바 이와 같은 말씀이 길이 된다. 저의 삶의 족적이 믿음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저와 함께 오르는 산의 정상에서 구원의 십자가를 마주한다.
말씀이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나를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감당할 능력이 되게 하신다. 곧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다. 만드신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에겐 이 말씀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
아이가 오지 못해서 속상하였다가 말씀을 붙들며 주를 바랄 수 있어 그게 전부였다. 삶 가운데서의 말씀이란,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내게 맡기신 일, ‘자기의 때’에 말씀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이는 모두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이 없다는 데 안도한다. 전에는 여느 것들에 눈이 멀어 다른 길이 없다는 진리 앞에 주저하고는 하였는데, 이제는 그것으로 안심하게 되었으니. 아브라함이 엘리에셀과 이스마엘로 대신하려 했던 약속의 씨에서 오직 하나, 독자 이삭을 얻음으로 성취에 도취될까하여 하나님은 일부러 저를 또 시험하신 것이다. 안 봐도 ‘금쪽같은 내 새끼’였을 텐데! 그 아들과 함께 오른 산에서 머잖은 훗날 그 약속의 실제 성취가 이루어질 것을 저는 믿음으로 이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고약한 변덕으로 그러시는 게 아닌 것을 말이다.
보면 그게 다 우리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완전한 자는 아니었다. 만일 저의 노년에 독자 이삭을 데리고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그의 말로는 역시 어찌 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도취되어 이삭을 숭배하지 않았겠나? 종종 엄마들을 상대하다보면 모양은 각기 달라도 다 제 자식들이 우상이라. 이리저리 모색을 끊이지 않는 희생도 다 들춰보면 숭배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일깨우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이와 같은 말씀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우리가 톡톡히 은혜의 시대를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백배는 더 분명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없던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율법에 상응하는 말씀을 그 삶에 두셨던 것처럼 성경이 주어진 오늘에는 그의 삶의 이야기조차 구원으로 인도한다.
결국 말씀은 이제 차별이 없으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이를 논증하고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결론은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오늘 나의 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축복이란 강권하심 가운데 있었다. 때론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요구이신 것 같으나 그 가운데서 주가 예비하신 은총이 있었다. 곧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그렇지! 오늘 이 말씀이 내게 요새다. 그 힘으로 내가 주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10).” 이는 주밖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르면서 확신하였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가 돌아오리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오늘도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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