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시편 60:4
갚을 수 있다면 은혜가 아니다. 깊은 정도를 안다면 또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이보다 역설적인 복음이 또 있을까? 우린 늘 우리의 우상으로 힘에 겹다. 그 대상도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엄마는 아이엄마대로, 하나님보다 더 귀한 존재는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제일 황당한 사건은 라헬인 줄 알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창 29:25).” 환장한다. 애써 수고한 나날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 7년을 꼬박 공들여 세운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런 줄 알고 만족스러움에 겨워 품에 안은 것인데,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23).” 세상은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말씀을 되새기며 참 놀라운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다들 동상이몽이구나!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원하고 야곱은 라헬을 원하나, 레아는 야곱의 몸만 가지고 야곱은 라헬을 흠모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레아는 가정의 정통과 가치에 충실하며 행복을 추구하지만 야곱의 사랑은 라헬을 바라는 것으로 기운다. 우상은 그 대상이 되는 것으로 질식할 것 같고, 바라는 쪽에서도 늘 애절하기만 하다. 서로의 간절함은 결이 다른 것이다.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 나는 이 말씀 앞에 허리를 숙인다.
그러했을 때 우린 남을 탓한다. 그 원망이 저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또는 자신을 탓한다. 자책과 자기혐오로 이루어진다. 아니면 세상을 탓한다. 모두 싸잡아 다들 거기서 거기 같다.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갈망으로 서로는 서로를 희구하는 만큼 절망한다. 엄마가 어찌 자기 아이에 대해 저렇게 말하나, 싶을 정도로 실망은 누적되어 아이 탓을 해댔다. 상대적으로 그만큼 자신의 인생을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레아는 평생 야곱의 사랑을 갈구하며 살았다. 레아에게서 유다가 나왔고 다윗이 나왔고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35).” 이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도 적용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리고 배척당하는 것까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바로 그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에게마저 버림을 받으시는 이 모든 여정을 레아의 품을 통해 상상해보았다. 남자는 사랑을 이용해 여자의 몸을 얻고, 여자는 남자의 몸을 통해 사랑을 얻는다. 그런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레아의 모든 기도에서 ‘여호와’가 붙든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있는 스스로 계신 자의 호칭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2, 33, 35).”
예수님은 레아의 후손으로 오셨다. 저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우리 구주 예수의 신세와 같다. 그런 가운데 주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주께서 예표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김할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전혀 별개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횡설수설 그 의식의 흐름은 정돈이 안 되는데도 녀석은 불쑥, ‘아멘’ 하고 고개를 든다. 덩달아 환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한 구절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공책에 옮겨 적는다. 아이는 글씨에 모양을 내는 동안 말씀은 아이의 마음에 스민다. 스밈으로 아멘이 나온다. 곧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60:4).” 누구는 지능이 낮다고 하고 누구는 조리 있게 표현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아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저와 같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눅눅하고 질퍽거리는 하루였다. 생각보다 몸은 어렵지 않았고, 아이가 돌아간 뒤 나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을 읽었다. 이 모든 게 하나하나 그 아귀가 딱딱 잘 맞아떨어지는 교훈 같았다. 오전에 노인은 으레 건너와 두서없이 말을 이어간다. 이 말 저 말 가운데 자기 판단과 기준을 신봉하고 있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문서작성을 가르치는데 진전이 없는 것은 자꾸 엉뚱한 소릴 해대기 때문이다. 그러다 손아래 동서 이야기가 나오면 그 내용이 거칠다. 일정부분은 상대적인 자격지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레아인 것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삶의 허망함을 나타내면서 결국은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묵상하게 한다. 나는 요즘 아이와 대화하고 노인과 말을 나누면서 새로운 연습 중이다. 모두는 자기 말에 취해 사는 것이다. 다들 멀쩡한 것 같은데 모두가 자기 틀 안에 갇혔다. 다 포용하고 마치 모든 걸 이해하는 듯하지만 듣다보면 자기 푸념으로 흐른다. 인생을 그리 표현하는 게 옳은 듯하다. 아침에 보니 레아더라. 라헬일 줄 알고 열심히 살아온 삶이었다. 라헬이길 바라며 기를 쓰고 수고하였다. 이 모든 게 탐심 때문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나 알 수 있을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일들이 모아져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스스로 탐욕이 많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부족함을 느낀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게 돈인 것처럼 여느 죄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 탐욕이 있다고 하면 억울해지는 것이다. 가진 게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아이를 더 나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는 아이엄마의 마음도 다들 상대적이어서 누구처럼, 어느 집 아이같이 되기를 바란다. 점수에 쫓기는 것은 그 차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를 우리는 사랑이라 여긴다. 모성애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내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둘째 아이는 나중에 보내시라 하고 선을 그었다.
우리는 이제 분별력과 결단력을 놓고 기도한다. 주의 마음으로 품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다 좋다하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그 아이의 엄마가 교회를 다니거나 다녔던 이라고 하면 더더욱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이의 실체를 말해주어야 하고, 치근덕거리듯 들러붙는 아이에 대한 간섭과 참견을 말려야 한다. 아이도 넘어지고 실수할 기회가 필요하다. 스스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주를 바랄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미연에 이를 다 방지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믿는다는 이들의 집착이 더 극성이어서, 아이가 병든 걸 아이엄마만 모른다.
이게 다 탐심이다. 자기 삶으로 부족해서 아이의 것까지 탐내는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유년시절을 아이에게 덧씌우고 포기하였던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면서, 스스로는 책 한 줄 읽지도 못하는 삶이면서 아이의 책장에는 온갖 위인전과 백과사전이 가득하다. 아이는 그러한 숭배로 인해 질식할 것 같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우리는 탐심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를 경계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아이에 대한 집착도 탐심으로 얼룩졌으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3-15).”
<내가 만든 신>을 읽으면서 팀 켈러가 새롭게 조명하는 내 안의 라헬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써 수고하였던 나의 노력과 세월을 지나,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는 삶의 허망함 앞에서! 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주께 아뢴다. 한 구절의 성경을 몇 번이고 다시 쓰면서 되뇌는 아이의 글씨를 사랑한다. 노인의 성공한 노년이 부럽지 않다. 다 가졌다고 여기는 자들의 허망함에 대하여, ‘아침에 보니 레아라!’ 이 한 구절로 압축할 수 있는 게 아니겠나? 누구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 11:30).”
긍휼하심이 아니라면 내가 오늘 여기에 없다. 이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저의 감복하는 표현을 음미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그렇게 허망한 줄로만 알았던 ‘레아’였으나 그녀에게서 예수가 나셨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4-35).”
이 놀라운 섭리와 역사 앞에 나는 놀란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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