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전봉석 2018. 8. 2. 07:10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9:8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무서울 정도로 더운 날씨다. 글방은 창가의 열기로 에어컨이 제 기능을 못하였다.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오전 시간만 잠깐 가동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한 아이 같으면 계속되는 무더위로 한두 주 좀 미루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글쓰기를 위해 오후에 글방에 오는 아이들은 다음 주까지 방학을 하였다. 선풍기를 돌려서는 감당이 안 되는 폭염이었다. 내 몸이 힘에 부쳐서 아이에 대한 마음도 어려웠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마치고 시편으로 넘어갔다. 글씨로 쓰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고 마음에 새기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랬더니 오늘 아침, 새벽 일찍 아이가 시편 1편을 묵상했다는 소리인지, 곱게 적은 글씨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그 마음이 갸륵하고 안쓰러웠다. 오늘은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난다면서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무슨 옷을 빌려달라느니, 뭘 가져오라느니 하는 것을 들어보니 탐탁치가 않았다. 뭐라 주의를 주긴 주었지만,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주께서 함께 하셔야지.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마음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꾸 속상하기만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어쩌면 그리스도인은 도인(道人)이 돼야 한다. 도를 닦는 의미로, 그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도대체 내가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대체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유익이 될까? 과연 내가 이러는 게 맞나? 내 안에 이는 여러 의문점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그럼에도 다시 반복하는 사람.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나는 무엇을 예측하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모한 반복이다. 말씀만 붙들고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아이를 오늘 내게 두시는 이의 뜻을 잘 알고 의미를 부여해서 어떤 보람을 가지고, 얼마큼의 확률과 기대를 가지고 가는 길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이에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 내 안에 이는 온갖 의구심이 때론 지치게 한다. 몸이 힘들 정도로 더운 날씨여서 그럴까? 땀에 쩍쩍 달라붙는 다리를 끌고 아이와 함께 걷는 일은 고역이라. 돈도 제법 든다. 더더욱 마음은 어려워서 좀체 나아지기는커녕 아이의 상태는 더 심한 것 같다. 때론 아이가 시선을 놓고 있으면 두렵기도 하여 내가 너무 긴장한다. 아이가 오고부터 화장실엘 너무 자주 간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어쩐다? 말씀은 일갈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라.’ 다른 수 없다!

 

그리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말씀을 나누는 데 있어, 이런 설명을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성령이 주도하심을 신뢰하는 일이다. 나는 아이로 인해 나를 견제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파한다는 일. 이를 글씨로 옮겨 아이가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가령 주기도문을 거의 암송하게 되었다. 5월 18일에 시작했으니 거의 석 달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뜨문뜨문 잃곤 하지만 괜찮다. 길 안에 길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아이에게 강조하며 너와 나의 이야기다, 하고 설명해주었다. 시편 1편을 여러 번 다시 읽고 글씨로 옮겨 한 자 한 자 써보게 하면서, 그것이 ‘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이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의 일이다. 생각 같으면 너무 더워서, 내 몸이 힘에 겨워서,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지만! ‘항상 힘쓰라.’ 성경의 거침없는 요구가 때론 흩뜨려지는 마음을 다잡게 한다. 그리하여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나머지는 주가 하신다.

 

어쩌겠나? 오늘 아침, 말씀은 일깨우신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연거푸 이어지는 ‘모든’이 감격스럽다. ‘모든 은혜를’, ‘모든 일에’,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넘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주신 날이 복되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게 잘하고 있는 일인지, 뭔가 좀 나아지려는지,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으나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시켜, 말씀으로, 모든 것에서,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일이다. 아이가 먼저 돌아가고 당구장 주인과 잠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에 대해 저는 안쓰러워하나 저나 나나 우리 날 계수함이 거기서 거기라. 허름해 보이는 사내여서 그리 안 봤는데, 100여 평 자리를 자신이 분양 받아 10년째 당구장을 하며 은행 대출을 갚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삶이 고로하였다.

 

누구는 아이보다 온전하다고 여겨 ‘그런 애들’이란 표현을 쓰는데 내가 보기엔 저의 삶도 그리 온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의 한계라니, 다 거기서 거긴 것을.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6).” 인생이란 그 자체로 허망한 것이어서,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 우리 입김의 무게만도 못한 생을 살면서,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62:9).” 누가 누굴 견주고 나무라고 측은지심으로 동정을 하나! 말씀 앞에서 다만 가소로울 따름이다.

 

그저 우리는 심을 뿐이라. 그럴 여력이 되든 안 되든 날마다 생을 다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오늘이 답이 아닌 것이다. 이생에서 결과를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게 두시는 마음이 복이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 나는 요즘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갈구하는 마음이 늘었다. 내 마음으로는 측은지심뿐이어서 말이다.

 

하나님이 하신다. 이것으로 이미 은혜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 마치 내가 아이를 위해 있는 것 같으나 아이를 날 위해 있게 하시는 것이다. 내게 더하시는 날들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영생을 꿈꾸게 하신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고로 주를 바라고 하는 일이어야 한다. 모든 게 주의 뜻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이다. 내가 저 앨 어쩔 것인가? 오늘에 처한 이 고깃덩어리 육신을 내가 어찌 주체할 것인가? 행여 힘에 겨워 그만두려할 때면 내가 먼저 견딜 수가 없는 일이어서 이 일 또한 신비하기만 하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시는 주님이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게 없었다. 때론 너무 흉내만 내는 일인 것 같아 송구할 정도인데,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그리 되게 하심이다. 이는 그 원리가 분명하여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9-10).”

 

이 길을 닦는 사람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오늘 우리의 거처이었다. 이 일은 단순히 우연하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 그 하나님이 조성하신 오늘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3-4).”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며 폭염이 기승을 떨고 있다지만, 매 해 우리의 여름은 견뎌내야 하는 더위였었다. 곧 또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면 호들갑을 떨며 그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일처럼, ‘인생들은 돌아가라.’

 

이에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인 것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그리하심을 몸소 삶으로 살아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증거였다. 비록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6).” 이 하찮음의 세계에서, 고작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한 줌의 바람보다 못한 시간을 사는 동안 이 가운데 영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