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10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편 88:2
어느 목사의 ‘무슨 복음’이란 책을 손위처남이 읽어보라고 주었다. 구원과 헌신과 신앙계승과 축복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경암기법으로 신명기 6장 6-9절의 말씀을 근간으로 하여 그 의미를 확대하였다. 결국은 축복인데 그래서 ‘잘살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마뜩치 않았다. 너무 더운 날씨였다. 글방이 너무 뜨거워서 책을 들고 아래층 카페에 내려가 읽었다.
결국 아이를 회사에서 돌려보냈다. 그러게 너무 성급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횡설수설하고 몸이 안 좋다고 하면서 일에 눌려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만 들어가 쉬라고 하고는 그리 그만두라고 하니 아이 입장에서는 마음이 상했을 거였다. 괜히 속상하고 답답했다. 한동안 아이와 연락이 닿지 않아 애를 태웠다. 다들 그렇듯 그저 병이 낫기를 바란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길 바란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란다. 이를 축복의 근거로 생각한다.
아침 일찍 옆 사무실 노인이 건너왔다. 나는 마나님 건강에 대해 물었다. 우울증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하루 스물두시간은 기력이 없어 누워만 있다고 하였다. 나는 그 원인으로 주 앞에 나오기를 바랐고 노인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종교적인 위로도 기력이 있고 정신력이 돼야 하는 것이라며, 혼잣말처럼 자기주장만 늘어놓았다. 그저 친절한 타인으로 있을 때에는 그런 그의 고집이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문제를 영적인 것으로, 당신이 주 앞에 나오기를 바라신다는 시각으로 말을 전하려니까 그 고집이 완강하였다. 한 시간 남짓 같은 말만 되풀이되었다.
나는 책을 읽다 집어던졌다. 결론은 잘살아 보세, 하는 것으로 성경의 축복을 그리 축소하고 있었다. 오늘 날 유대인들이 그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명석하고 뛰어난 것을 두고 그것이 성경을 암송하는 데서 오는 축복이라 결론을 이끌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그리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주 앞에 바라는 복이 단지 오늘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정도라면 이 얼마나 청맹과니 같은 일일까? 눈을 뜨고 보긴 보는데 정작 봐야 할 걸 보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 노인과 이야기하다 선생의 그 소리와 같았다. 아이의 상태를 두고 그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우리는 그게 다인가?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이 겨우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라면, 그래서 종교는 위안의 정도로 족한 일이라면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나?
예수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병 고침을 받고, 배고픔을 모면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오늘도 지상낙원을 꿈꾸며 어디 섬으로 몰려간 사람들처럼, 교회를 말씀을 예수를 그렇게 찾고 바라고 구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뭐라 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 듯하여 더는 노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뇌의 문제이고 정신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믿는다는 신앙으로 이겨내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는 투였다. 나는 그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20).” 주가 이루실 일이다. 나는 다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 주를 바랄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 믿는 이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저들을 위해 지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도 단지 측은지심이면 망할 마음이다. 이로써 주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저이의 우울증도 실은 안 믿는 남자를 만나 평생을 에워싸이듯 신앙이 억눌렸고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막힘이다. 하필 저의 아들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었으니, 저들 눈에는 믿는다는 사람들이 당하는 숱한 어려움과 곤란한 처지만이 눈에 드는 것이다. 노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목사인 동서에게 5천만 원을 꾸어주었던 일. 그걸 돌려받지 못해 이를 빌려간 처제와 처를 두고 욕을 해댔으니 다들 믿는다는 사람들이라.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리 곤란하게 된 믿는 사람으로서의 답답함을 주께 부르짖는 듯하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1-2).” 주를 바라고 의뢰할 때 좀 더 잘되어 세상적인 출세와 성공이 이루어져야 할 일인데, 도리어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6-7).” 이런 낭패라. 그러니 저 노인의 축은 세상에서의 삶의 질이 축복의 성패다. 믿는다는 이들의 궁상이 저는 못마땅한 것이다.
어느 목사의 ‘무슨 복음’은 그리 갑갑해하는 사람들에게 먹힐만하겠다. 사람들이 몰리고 돈이 들어와 어디에 얼마만한 수양관을 지었고 얼마 만에 어느 만큼의 신자들이 모였는가가 척도였다. 모르겠다, 나는. 왠지 그런 소리가 다 다단계스러워서 말이다. 그럴 거였으면 예수님은 끝내 성공을 이루었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내 주를 따르던 열두제자마저 잃었으니, 그러면서 예수를 따르자는 논리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듯하다.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3-4).” 이와 같은 호소는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너나 잘하세요.’ 하는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노인에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8).”
이런 지경에 놓인 것이라면 저주가 아닌가? 아이는 결국 회사에서 잘렸고, 몸도 마음도 상처를 받아 시무룩하였다. 단지 믿는다는 이모는 아이의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주께 맡긴다는 막연한 소리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었으니, 우리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이가 주님이시지 않은가?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1).” 내 속이 답답하여서 말이다.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12).” 내게도 어떤 능력이 있어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고 싶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세우며 주의 축복을 운운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싶다. 예수님도 보란 듯 십자가를 박차고 내려오셔서 저를 대적하는 이들을 물리치셨다면 어땠을까? 일이 잘 풀리는가 싶더니 더 꼬이고, 늘 빌빌하면서 저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무얼 드러내어 주를 바랄까?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나는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4).”
여전히 어렵고 힘든 오늘이 당황스럽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15).” 이를 어찌해야 하나?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16).” 찌는 듯한 더위에 아이는 연락이 닿지 않고, 회사에서는 그만 나오라 하고, 낙심하여 실의에 빠질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어려웠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17).” 그 와중에도 다리는 저리고 시리고, 허리는 아파서 자꾸 좀 누워야겠고, 딱히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누구를 붙들고 애원할 수 있겠나?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8).”
고약하고 고단한 하루였다. 오후께 아이가 ‘잘 도착했어요!’ 하고 카톡을 주었을 때 울컥하는 마음으로 내 무얼 할 수 있을까?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2).” 나는 오늘 시편 88편의 심정으로 주를 바란다. 이와 같은 근심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맞춤하니 오늘 말씀을 나를 붙드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이 근심이 얼마나 나를 간절하게 하는가!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주 앞에 서는 수밖에. 나는 할 수 없어서! 누구처럼 유태인들의 성경암송을 끌어다 붙여 오늘 날 저들이 세계적으로 훌륭하고 독보적으로 뛰어난 것에 축복의 키를 두고 ‘잘 살아 보세’ 하는 말을 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들!
모르겠다, 나는. 그저 한 영혼으로도 벅찬 그릇이라. 말 그대로 나 하나 건사하는 일조차 힘에 겨워 주 없이 살 수 없는 위인이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1).” 그렇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두시는 십자가라. 그리하여 나는 다만,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2).”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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