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브리서 10:36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보기 좋게 넘어져 별이 번쩍하게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졌다. 어떤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이 먼저 내려앉았다. 다음은 부끄러움이 그 다음은 통증이 차례로 밀려왔다가 역순으로 물러갔다. 나보다 아내가 더 놀래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조금 지나자 모든 게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산다는 것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산 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이는 막연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의 사실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30).” 이것이 오늘 날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누구는 몇 천 명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겠으나, 누구는 한 명의 아이에게, 또 누구는 살아서 홀로 있으면서 ‘다하여’ 주를 사랑하는 일.
그 일의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일상이다. 그 소소하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중에도 나는 ‘다하여’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점심께 놀러온 동기 전도사 가족에게 나는 그리 말해주었고, 다짐하듯 확신하였다. 우리의 열심이 얼마나 우릴 삼키곤 하는지. 괜한 나의 계획이 또 그럴듯한 바람이 현실을 외면하게 하곤 하는지. 나의 못난 일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오해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이해하는 일이다. 좋을 대로 여겨 그리 해석하고 바라는, 자기합리다. 오해는 이해의 적이다. 늘 곁에서 살짝 비틀고 왜곡하는 자기 의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는 까닭은 현실 부정에서 온다. 낭만을 꿈꾸는 이는 현실도피의 과대포장이다. 나는 그런 게 뭔지 잘 안다. 하루 종일 누워서 빙빙 떠도는 상상으로 앞날을 꿈꿀 수 있다. 어떤 세계를 바랄 수 있다. 한참 낚시에 젖어 살 때 물끄러미 낚싯대를 드리우고 즐겼던 일이 공상이었다. 꿈꿀 권리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여전히 그 지긋지긋한 현실인 것이고. 주님은 그렇듯 ‘내려가자’ 하시며 삶의 현장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있는 것으로 저주 같은 현실부정에 대하여 예수님의 일깨움은 가차 없으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그렇듯 ‘만일 네 발이’, ‘만일 네 눈이’ 그러하다면 그리 찍어내고 빼버리라 하신다.
그런 걸 우린 ‘~하면’, ‘~만 있어도’ 하는 식으로 꿈꾼다. 누구나 꿈꿀 권리를 주장하지만 그 ‘꿈꿀 권리’는 ‘꿈꿀 의무’를 다한 뒤 얻는 것이지 마땅히 취할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냥 그리 하는 건 현실도피다. 자기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엄연히 말씀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 분량에 맞게 사는 것이 복이라 하신다.
누구처럼, 어떻게만 된다면, 하는 식의 발상은 오늘을 부정하는 데서 온다. 마뜩치 않은 것이다. 지금이 싫다. 오늘을 두신, 지금이 싫은 하나님을 어찌 장래에는, 또 다른 일에서는 바로 바라고 섬길 수 있다는 소린지. 나는 그렇듯 발라당 자빠질 때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게 두신 그 이상의 생각을 멈춘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아이는 충분히 아이의 고통으로 그 맡기신 사명을 다한다. 누구라도 아이 앞에 서면 주를 바란다.
손을 한 번 잡고 눈을 한 번 마주치고, 그러다 아이가 씨익- 웃어주기라도 하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탄성이 나오면서. 감히 말하자면 아이를 보면 예수 같다. 저 앞에서 찬송과 경배를 배운다. 그 부모의 눈물겨운 돌봄과 수고 앞에서 목이 메고 가슴이 절절한 것도, 저들이 예수라. 내 앞에 두신 온전한 사명자다. 그 역할을 다하는 것. 나는 어쩌면 동기 전도사 내외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누가 오늘 나를 마주하고 예수를 생각할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사역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무얼 얼마나 감당하며 사는 대단함이 아니라, 주신 날을 묵묵히 준행하는 삶으로의 마땅함.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일.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이 현상은 자꾸 헛된 바람이다.
거기서 눈물이 서러움이 어떤 원통함으로 우리의 감사를 훼방한다. 대체 무엇으로 얼마나 더 선을 이루고 뜻을 펼치며 그럴듯하니 낭만적으로 사는 게 사역이겠나?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나는 한참씩 ‘예수원’을 꿈꿨다. 어떤 공동체를 바랐고, 무슨 단체의 어떤 실현을 부러워했다. 그렇듯 나의 목회를 바랐고 주께 구하기도 하였다. 한들, 우리는 부정한 것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7).” 자기만족을 위한 모든 게 거짓이라.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이 바라는 것으로 꿰맞추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면서 마치 하나님 때문에 희생하는 삶인 양 꼴값을 떠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꼭 그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기도해봤는데,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꿈에 계시로’ 하는 따위의 말을 즐겨 사용하며 실은 자기를 드러낸다.
그런 판국에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인내를 요구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인내는 참고 견딜 때 쓰는 말이다. 좋아서 훠이훠이 행할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머무는 것을 예수님은 마다하셨다. 인내는 환난의 전유물이다. 환난은 피하면서 인내는 액세서리처럼 달고 자랑하려 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혼자 사역을 다하는 듯 목소리도 발걸음도 몸짓도 꾸며내어 모양을 먼저 갖추려는 꼴이라니!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남들 앞에 보이려 드는 모든 처사가 꼴불견이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이는 마음이다. 목사니까, 사역이니까, 교회니까 하는 어떤 당위가 먼저 나를 망가뜨리는 일이다. 위선을 위선이라 알지 못하게 굳어져버린 자기합리고 자기만족이다. 그러면서 주의 뜻을 운운하고 주의 길을 모색하는 일이라니. 결국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의 가로등을 컸다 껐다 하는 사람이고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땅을 연구하는 지리학자이며 혼자 있으면서 누구를 치리하고 다스리려 드는 왕 같다.
어린왕자가 만난 어느 혹성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늘 생각만 많고 머리로만 알고 꿈꿀 권리로 일관하고 있을 때, 나를 벌러덩 넘어지게 하시는 이의 오늘 이 일상이 내게 두신 사역지이다. 다시 일어나 지끈거리는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다시 움직여야 하는 게 사역이다. 주신 날, 주신 이의 뜻을 먼저 바라고 구한다는 일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그리 또 참고 인내하며 사는 일이다. 일 년에 몇 번 만나는 게 전부이지만, 나는 아이를 볼 때면 그래서 예수를 본다.
아픈 게 저 아이의 사역이라. 누구보다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 일이어서, 누구라도 저 앞에 서면 숙연하여 주를 찾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듯하나 최선으로 자신의 전부를 살다간 이의 충실함이 주께 올려드리는 최고의 사역이었다. 나는 감히 그리 이해한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이 아침에 나로 하여금 전날의 일을 떠올리며, 새로 허락하신 한 날의 삶으로 충실할 수 있게 하시기를. 이를 위하여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아니면 전부다 아니다. 말씀으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 의지로가 아니다. 꿈꾸는 낭만으로도 아니다. 어떤 결단과 죽어라 하는 열심으로도 아니다. ‘주의 인자한 말씀’으로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나는 아침이면 주게 바란다. 또 한 날을 허락하신 이에게, 나의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상에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
그러므로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내 곁에 두시는 이웃과 아이와 아내와 딸아이를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은 나의 너그러움이나 인품에 의한 게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가능한 사랑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참고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의 마음으로, 나의 수고와 애씀으로가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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