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브리서 8:6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편 141:5
날은 청명하고 바람은 청아하였다. 나도 내가 염려하는 불안의 99%는 일어나지 않을 예기불안인 것을 안다. 지니고 보면 모든 게 순탄하였고 늘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늘 새로이 어딜 가야 하고, 어떤 일을 접해야 하는 데는 적잖이 두려움이 앞선다. 가령 아버지 집에서 축령산휴양림으로 가야 하는 날, 누가 오고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일, 그리 옥죈 불안으로 아침까지 거르고 속을 달래는데도 숨은 가쁘고 호흡은 곤란하여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 식구를 데리고 먼저 출발하여 바짝 긴장을 하였는데, 길은 헐렁하였고 무사히 초입에 도착하여 산채비빔밥을 먹을 때의 평안함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싶을 정도의 감사와 만족함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면서. 문득 우리의 생이 끝나는 날 주가 우리를 영접하시는 그 나라에 당도하였을 때의 충만함이 과연 이런 게 아니겠나싶은. 숙소 앞에서 나중에 오는 가족들을 기다리며 나무 그늘에 앉았을 때의 만족함으로 주의 은혜를 더욱 귀히 알겠더라. 언제나 늘 함께 하심으로 더하시는 주의 은총에 대해서 말이다.
아침에 함께 모여 추석 감사예배를 드리지 못해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이나 안 믿는 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들려주셨다(막 12:18-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 그러니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는 일이 그때에만 있었겠나? 사람의 유익을 따라 오늘에도 묵인하는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는 엄밀히 말해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산 자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의 추도나 추모이고 심지어 탈상 후 삼우제 예배와 같은 경우는 옳지 않다. 성경을 오해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27).” 우리로 살아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여호와의 직분으로 그 능력을 우리에게 행하신다. 곧 우리가 죽으면 우리 개개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직분도 사라진다.
나는 여호와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출 6:29).” 하나님은 그리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오늘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이를 알게 하시려고, 알기까지 오늘 우리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거였다. 여호와의 직분으로 지칭되는 하나님(엘로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
그러므로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18).”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이와 같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사와 두려운 마음뿐이다. 오늘 말씀을 여기서 다시 묵상하면,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결국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이 한 날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누구는 여러 일을 누구는 단 하나의 일도 어려워하며 쩔쩔매는 것이 인생이겠으나 그러는 동안 여호와(야훼)께서는 하나님(엘로힘)의 직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곧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5).” 살아서 그 두신 자리의 사명을 다하는 게 결국은 은혜이었고 은총이었다. 그저 살다 그만인 것으로 부활은 없다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가르쳐 말씀하시길 그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곧 살아 있는 동안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써 내가 이 땅의 생을 다하는 동안에만 하나님이시다.
죽은 자를 기리고 그리워할 수는 있겠으나 어쩌면 이도 산 자를 위한 낭만의 정도이지 더는 아무 의미도 아니다. 한데 저들 앞에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려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 얼마나 가련하고 가증된 일인지. 살아서 살아생전에 다하지 못한 자기합리요 자기기만이 아니겠나. 아버지의 설교는 늘 듣는 말씀이면서 또한 새로웠다. 추석 감사예배를 마치고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막내 동생 교회의 혼탁한 상황을 두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원로 장로로 지칭되는 저들 무리의 반동과 결국 그 등살에 교회 앞에서 스스로 물러난 담임 목사와 공석이 된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전임 부목사로서의 동생 입지가 생각보다 엄중하였다. 저들 작당에게 동생은 계륵이다. 흔쾌히 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해결하는데 있어 귀중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으니. 동생은 환멸스러워하며 그냥 조용히 물러나고 싶어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교회의 고질적인 내분과 다툼은 결국 헤게모니싸움이다. 주도권을 쥐고 서로 흔들지 못해 안달이고, 이는 그 안에 각종 이권과 권력이 또는 모종의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일이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저도 조용히 물러나고 싶어 하는 동생의 심정은 알겠는데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겠다. 하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듯하였다. 그런저런 대화 속에서 사람이 결국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나는 이 말씀의 의미로 새삼 등골이 오싹하였다. 우리가 아직 살아서 사는 것의 소중함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죽어 더는 어쩔 수 없는, 말 그대로 모든 게 끝난 뒤에는 어찌 돌이킬 수도, 더는 용서도 긍휼도 적용이 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시 141:5).”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재난이 실은 기도의 제목이라. 복이라. 감사의 이유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흠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7-8).” 곧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9).”
이와 같이 말씀을 주시고 나의 마음에 두어, 내가 살아서 산 자로서 산 자의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2).” 날마다 죄인이지만 날마다 은총인 것은 살아서 아직 산 자로 내가 사는 날 동안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 귀중하였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결국 우리의 몸은 쇠하나 우리 영혼은 날로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것이 오늘도 새 하루를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이시겠다. 다들 저들 좋을 대로 좋은 것을 붙들고 사는 세상에서 우리의 구심점은 말씀이라. 더욱이 목사로 사는 삶의 특권은 누구보다 말씀을 방패로 붙들고 사는 게 아니겠나?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7).”
모든 때와 장소를 주가 예비하심이다. 오늘 이 날의 소중함 앞에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5:3).” 행여나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4).” 당장은 힘에 부쳐하는 동생의 목회 현장과 그의 사역을 두고 주께 기도한다. 주의 뜻에 온전하여 바른 힘과 용기로 주 앞에만 서기를. 또한 늙으신 부모님과 저들의 남은 생애를 두고 주께 간구한다. 부디 주 앞에서 평온하여 감사한 날들로 이어지길.
그러므로 살아서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오직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그리하여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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