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4-2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아들이 전화를 주었다. 아빠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하고 물었다. 뭉클한 것이 어떤 고마움 같기도 하고, 주께 감사하여서 눈물겨웠다. 꽤 긴 시간을 통화할 수 있었다. 문득 하나님의 마음이 그려졌다. 자꾸 내 의견을 말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구하기보다 이를 멈추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물을 때 그 벅찬 감격이 이러실 게 아닌가? 다윗을 그처럼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긴 데는 그런 게 아닐까?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저는 하나님께 묻는 자였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5:19).”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일련의 일들은 언제쯤, 얼마나 주께 아뢰어 여쭈고 내 의견을 내려놓는가, 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하고 종교적이며 나름의 의미가 처벌처벌 넘친다 해도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주께 여쭐 수 있는 자세가 복되었다.
내가 어찌 알아서 척척 해내는 것을 주가 바라시는 게 아니다. 성경은 이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사울은 그리하여 제사를 손수 꾸렸고, 죽은 사무엘 선지자를 끌어올릴 정도로 종교적이었으나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다. 아들의 통화에서 그 첫 마디, 아빠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그리 이해하였다. 말씀을 구하는 일, ‘갖다 먹어버리라.’ 하시는 말씀을 읽다 그것이 단순히 그러는 정도 이상의 의지와 투철한 기백이 필요한 것을 묵상하였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이는 젊은 사자가 먹잇감을 움키고 놓지 않는 으르렁거림이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또한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이는 비둘기나 학 같이 그 간절함으로 먹이를 구하는 구구거림과 같은 거였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단순히 어떡하지? 하는 정도의 난감함이 아니었다. 말씀을 구하고 주를 바라는 것은 필사적인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하는 말씀으로 정리하고 있다.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일이다. 주를 경외함이란, 이와 같은 말씀을 구하는 일이다. 잡은 것을 놓지 않는 젊은 사자의 포효이고 날짐승들의 앙망함이었다. 나는 평소 가지고 있던, 아들에게 바라는 생각을 다 말하였다. ‘그런 일’을 안 했으면 좋겠는 것과 일단 그 순리대로 마쳐야 할 공부에 전념하고, 끝나면 귀국하여 주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된다고 일렀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일을 하고 그 모든 게 주신 바 우리의 터전이고 환경이겠으나, 그렇다고 그런 직업을 주가 주신 것이라 여기며 살면 안 된다. 그 선택은 우리 것이다. 이를 하나님은 도우시는 것뿐이다. 결코 우리의 직업이 거룩한 게 아니다. 하는 일이 귀하고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사는 데 따른 선택으로 그 의미는 전적으로 자신이 정한 것이다. 다만 주님은 그럼에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주의 자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뿐이다.
열심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는 것을 주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기독교단체라고 해서 또는 크리스천기업이라고 해서 그 일이 존귀한 게 아니다.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도 주가 이루시는 은혜와 축복이 귀한 것이다. 나는 이제 그런 확신을 갖는다.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복음 전하는 목회자로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그러느라’ 삶을 사는데 장사하는 사람은 눈만 뜨면 그 일에 종사한다. 운전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그 일에 매진한다.
그렇다면 가장 선하여 의를 바라는 일은 무엇일까? 늘 한결같이 말씀을 갖다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까? 물론 모든 업종의 종사자들로 성실히 살다가는 일은 복되다. 하지만 그러느라 과하게 소비되는 말품과 발품과 늘 시달리듯 얽매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직업은 그 사람의 생활을 주도한다. 무슨 일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진다. 아들은 나의 이런 장황한 설명을 어찌 들었을까?
그 나이 때 나의 어그러진 생활을 돌아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항상 나의 기도제목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부디 먼 길을 돌지 않기를. 아직은 어리고 젊어서 이와 같은 말이 와 닿지도 않겠지만 그럼에도 세월은 흐른다. 시간은 돌아간다. 한 번 거기서 그 일을 시작하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은 더 그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고,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 알 수 없으나 언제쯤 나이가 들어 돌아왔을 때 또 무엇을 새로 일구어야 할 것이었으니.
본인도 그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듯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 6개월 전만 해도 오늘의 그 문제로 갈등하고 그렇듯 일이 전개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었나? 그렇다면 앞으로 6개월 후에 어찌될지? 혹은 1년 후에 어찌될지? 과연 우리가 어찌 장담할까?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아빠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는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을 내려놓고 묵묵히 주의 뜻을 바라는 길이다. 그냥 막연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지금, 오늘’ 내게 주시는 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 일렀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우리의 난제라. 그럼 뭔가 가시적인 게 뚝딱, 전개가 돼야 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소린가? 오히려 주께서 내게 분노로 채우시는 것만 같다.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것을 놓고 주의 말씀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도, 그 기다림은 때로 너무 막연하여 덧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아들에게 말하길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게 하면 되는 거라 말하였다. 뭔가를 꿈꾸고 어떤 일을 도모하느라 당장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등한히 여기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이렇듯 ‘이런 일’이나 해서 뭐하나 싶겠지만, 오늘 내게 두시는 일이 ‘저 아이’ 하나라면 저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대하고 돌보는 일이 충성이었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모든 변화는 미미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늘 똥을 싸고 오는 아이가 있다. 엄마는 태국인이고 아빠는 무슨 항공사에서 일한다. 엄마는 태국마사지 일을 한다고 들었다. 둘은 늘 바쁘다. 언어가 미숙한 아이엄마도 그렇지만 그래서 아빠는 늘 아직 어린아이를 혼낸다. 때리고 야단치고 윽박지르며 기른다. 아이는 그래서 자꾸 숨긴다. 아내는 언제부터 아이가 오면 똥꼬를 먼저 씻기고 심한 경우 옷을 갈아입힌다. 아이아빠가 미안해하자 아내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애를 자꾸 야단치지 마시라. 윽박지르지 마시라. 아직 어려서 그렇고 뚱뚱해서 그렇고 실은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런다. 그런 걸 자꾸 야단만 친다고 되겠나?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면서 아이보다 아이아빠가 조금씩 달라졌다. 또 혼났니? 하고 물으니까 아빠가 이제 화를 안 내고, 잘해보자 했단다. 그 말에 감격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한다는 게 당장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고, 안 믿는 부모들을 억지로 변화시켜 단시일 내에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똥을 싸고 온 아이를 씻기고, 떠듬거리는 한글을 가르치는 일. 스물두 살 먹은 아이가 어떤 답답함을 호소할 때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귀를 기울이며 들어주는 일.
‘갖다 먹어버리라’는 말씀을 나는 이제 그리 새겨듣는다. 때론 억지로라도 삼켜야 하는 일이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9).” 때론 억지로라도, 일상을 따라 습관을 좇아 이렇듯 말씀 앞에 앉는 일. 그 일의 실천은 내 앞에 두시는 한 날의 삶을 사는 일이다. 때론 기꺼운 마음이 아니어도, 주께서 내 안에 분노를 넣어주시는 일이라 해도. 갖다, 먹어버리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우리의 일은 직업 그 자체로 영광을 받는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서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대기업에 취직이 됐든, 철밥통 같은 공기업에 근무를 했든, 무슨 장사를 했든, 어떤 사업을 했든. 말씀을 먹는데 자꾸 걸림이 되는 일이면 그 일은 지옥이다. 곧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니 인생은 그런 것이어서, 오직 말씀만이 영원하다.
모든 일이 주의 부르심 같으나 그것은 궁극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지금 당장 그럼 뭘 해야 하나? 그건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의 문제다. 여기서 ‘그냥’은 온전히 주를 신뢰함이다. 자꾸 되묻지 않는다.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내게 두시는 한 날이라면, 저 아이라. 이 몸뚱이라. 짐짓 충성됨으로 ‘갖다 먹어버리라.’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이는 명령이었다.
곧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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