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야고보서 4:5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사람 참 어렵다. 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싫어, 하고 말했다가도 그러면 안 되지 싶은데 그게 또 보면 영락없다. 어쩜 그럴까, 싶은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난들 누구에게는 아니 그렇겠나,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마저 인다. 그런 마음이 오늘 말씀이라니!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그럼에도 우리 속의 성령 하나님이 시기하시기까지 성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내 안에 계시면서 얼마나 혐오스럽고 미천하여 한심하실까. 그런 자를 사랑하시는 데 한이 없으시니,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심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그러자면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 이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 말씀이 길을 보이시는 것 같다.
필리핀 동생 목사가 전화를 주었다. 긴 내용이 이어졌다. 같이 들어와 살게 된 손아래 처남이 가관이라. 그걸 뜯어고쳐 휘어잡고 살든가, 그로 인해 튕겨져 나와 한국으로 들어오던가. 전자는 어린 자식들에게도 못 보일 꼴이라 후자를 선택한 모양인데, 어쩌겠나. 그래서 우울해했구나. 단지 나이가 들어 감상에 젖은 게 아니었구나. 들으며 생각하였고 생각하면서 사람에게 자꾸 환멸이 일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불쾌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불쾌감을 느끼실 정도라는 소린데, 보면 우리가 얼마나 좌악 된 존재인지. 누구를 뭐라 할 것도 없이 내가 나를 봐도 알만하다. 시기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전폭적이심으로 그 긍휼하심으로 산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께서 이끄심이 참으로 오묘하시다.
늘 보면 내 생각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나의 생각 기저에는 항상,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교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동생의 긴 사연을 듣고 우리는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아내는 자전거 타는데 이제 자신감이 붙었다. 햇살은 곱고 따가운데 그늘은 어느새 서늘하여 추웠다. ‘그러게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여기면서도 속상하였다.
나는 사업하는 사람들의 허풍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과장된 친절과 언제 봤다고 터무니없이 상냥하고 공손한 언어와 몸짓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계하고 혐오한다. 보면 늘 그랬던 사람이 야박하게 등을 보이고 몹쓸 말을 지어내고 돌아가서는 온갖 험담을 이어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말하다 나도 모르게 어떤 서글픔이 또는 환멸이 일어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어쩐지 그렇게도 마음이 좋지 않아 아들이 저와 같이 뭘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더니만. 그래서 속 끓이고 있었더니 하나님이 이처럼 길을 돌려세우시려나. 나는 아내와 딸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였다. 고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오늘 말씀은 그리 첫 마디를 열고 있는 것이다. 정욕이라 하면 우리 안에 이는 여러 욕구를 의미하는데, ‘사욕의 하나로 물건을 탐내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모든 다툼은 거기서 온다.
곧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2-3).”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우리로 채우신다. 그것이 때론 더디게 여겨지고 또는 다른 길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그것이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곧 내 이야기였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내가 싫어하는 저들의 모습이 실은 나였다. 여전하여서 늘 싸우고 다투어도 이길 수 없는 허풍이고 위선이고 거짓으로 꾸며진 마음이다. 나는 당장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뭐라 이를까, 하다 동생에게 일러 그리 시간을 두었다. 먼저 나서서 누구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생각이 많으니 마음이 쫄리고, 마음이 자꾸 부대껴서 그런가 자꾸 호흡이 가쁘고 답답하여서 힘들다.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오늘 말씀이 귀히 여겨진다. 주의 사모하심이 나의 것보다 항상 크시다. 오히려 내 생각이 번번이 틀려서 다행이다. 아닌 척 할 뿐 내 안에는 항상 위선과 아집이 득시글거린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저의 어쩔 수 없음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열등의식이 가득하다. 일찍이 돈은 벌었지, 어려서부터 갖고 살았던 자의식은 자기보다 난 줄 알았던 어른이나 선생이 돈 앞에서 무력하게 굴었으니 그 위에 군림하기 좋았던 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아니면 안 되는 게 있나? 그리 여겨 교회도 일구고 목사도 쥐고 하나님을 어찌 조종하려 드는 것이었겠으니 알만하다. 변덕은 죽 끓듯 하고 자신의 못난 바를 허세로 치장하고 사는 수밖에. 저는 공허한 사람이라.
늘 그 마음에 억울함이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교만 위에 터를 닦고 앉아서이다. 폼은 나는데 할 건 없고, 할 일은 많은데 만족함은 없으니 ‘너나 엿 먹어라.’ 하는 심보로 누구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그 허물만을 들추어 자기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러게. 자고로 ‘심장에 좋지 않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너무 위로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밑으로 내리는 것이다.’ 사탄이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은 그래서 비교의식이다. 남은 어떤데, 누군 어떠니 하는 식으로, 자기의 시기심을 그리 감추려 드는 열등의식도 교만이다.
스스로 잘난 줄 아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기는 어렵다. 굳이 은혜가 아니어도 ‘스스로 이만큼을 이루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그게 내 것이 아님을 늘 명심하는데 은혜가 소진됐거나 더는 바라지 않는 자는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으로만 옳다고 한다. 나는 공원에 앉아 생각이 많았고 햇살이 길게 드리워지면서 금세 기온은 서늘하였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이 모든 일이 우화 같다. 내게 두시는 교훈이다.
어찌 그 긴 세월이 허송세월이겠나. 나는 동생을 위로하다 하나님이 다음을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가만히 기다리자 하고 말하였다. 여태 우리가 내 돈 주고 살았던가? 언제 누구처럼 그리 가진 게 많아 떵떵거리며 남들 위에 군림했던가? 어림없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 오늘 말씀은 갈피를 잡게 하신다. 이길 수 있는 길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함이다. 때론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하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말씀 하나하나가 이제 어찌 행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두 마음을 품고서는, 그래서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게 더 쉽다고 하셨던 것이구나.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엄밀히 불가능하다. 나름 구제하고 선히 쓴다 해도 열에 아홉은 불법적인 방식이 아니면 돈을 모을 수 없는 구조다. 이 사회는 말이다.
누가 주 앞에서 누구보다는 좀 낫다고 여길 수 있겠나? 나도 다를 바 없어서 공연히 더 답답하고 속상한 게 아닌가. 그 길을 아들이 걸어내야 하고 딸애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어서, 사람으로 사는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여 고달프기 그지없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 우린 자꾸 행복하자 외치는데 성경은 자꾸 애통하라고 이르신다. 스스로 그럴 수 없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
주가 하시게 두는 삶으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5-16).” 행여 나의 가는 길이 그러하지는 않은지.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주 앞에 앉아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마음이 어려워 숨은 가빴고 가슴이 자꾸 먹먹하여, 실제 호흡이 어려워서 자꾸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어서. 그러니 성령도 시기하실 정도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말씀에 깊이 안도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 그 거룩하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신다.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로 환난에서 끌어내신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50:1).
그리하여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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