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18. 10. 10. 07:0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6-7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말씀 앞에 아멘이다. 생각은 많고 나름의 계획은 치밀하였어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는 데 있어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신다. 언제나 나의 생각보다 높으시다. 주의 긍휼하심은 나의 죄악보다 크시다. 곧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 손을 마주잡기까지 돌보신다. 그리하여 나의 염려를 주께 맡기기까지 들어주신다.

 

오늘 말씀이 한 자 한 자 내 곁에 뿌려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이는 앞서 주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에 있어 내가 무엇을 어찌하려드는 것에 대한 말씀 후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곁에 두시는 이를 우리는 자원함으로 돌보고 저들에게 본이 돼야 하는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2-3).”

 

그런 거 보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이란 그저 묵묵함인 것 같다. 때론 마뜩치 않은 사람을 우리 중에 두시는데도 우리는 그 두시는 동안을 위하고 돌보는 것이다. 다 주의 양 무리였다. 어째서 ‘저런 아이’를, ‘저런 사람’을 우리 중에 두시는가, 신경을 쓰고 마음을 기울임으로 주가 맡기신 일이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저절로 그리 되는 마음이 숨은 뜻이었다.

 

전날에 친구와 누구의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언급이 친구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하였다. 저가 보기에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사는 주제에 누굴 위하고 돌보고 함께 하는가싶은 것이다. 그래서 투덜거리듯 뭐라 하다가도 자기 조카아이를 보냈으면, 자기 고3 아이를 좀 오게 하였으면 하는 식이었으니. 주의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의 일이었다.

 

우리가 억지로 누굴 끌어들이는 일도 아니고 붙들어두어 어찌 건사하는 대목의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 사랑,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고로 우리는 주의 ‘자기 사람들’이고 우리 곁에 두시는 저들도 혹여 ‘주의 사람들’일 거여서, 할 수 있는 동안 우리로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었다.

 

아내와 둘이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돌았다. 포구는 축제로 인해 사람들이 득실거렸고, 한산한 거리로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잠깐 멈춰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아이 얘기다. 중3 아이 누구, 초딩 아이 누구, 왜 뜬금없이 우리의 대화로 이어지는가했더니 그게 또한 주가 맡기신 양 무리였던 것. 왜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가했더니 그게 또한 우리 일이었던 것이다.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저들을 우리 곁에 두심으로 우리로 자기 사람들을 같이 돌보게 하시는 거였고 동시에 그런 우리를 돌보시는 일이었다. 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곧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이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건강과 돈과 시간과 마음을 기울여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게 하시는 일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는 것인데 어떤 “이득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었다. “기꺼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음으로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삶이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신 이 땅에서의 사명인 거였다(벧전 5:2-3). 그러니 때론 속이 볶이고 신경이 쓰여,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체로 아픈 이유가 신경성이라고 하는데 오죽하면 그럴까? 나의 못난 자아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기도였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어쩌면 나의 신경성은 교만의 결과이고 겸손의 시작이겠다. 스스로 볶여 속을 끓이는 일이고 그것으로 주 앞에 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내가 이루는 게 내 삶이 아니었다. 부쩍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다들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잘난 체, 괜찮은 척하고 살지만 그 본심에는 두려움이 깔려있는 것이다. 왜 그처럼 공부도 많이 하고 멋진 의사가 되어서 매일 술에 절어 사는가, 싶은데 실은 그의 안에 풀지 못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에 그 형님의 누이 되는 이가 환갑을 훌쩍 넘기고도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곧 숨을 거둘 엄마에게 왜 자기를 한 번도 칭찬해주지 않았는지, 어렸을 때 왜 그처럼 엄하고 무섭게만 굴었는지를 따져 묻더란다. 나는 저이의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문상을 온 막내 동생 친구인 내게 그런 말을 토해내며 눈물을 찍어내던 모습이 말이다. 겸손하라. 이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곧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지혜란 그런 거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그렇구나. 왜 우리가 날마다 또 이처럼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 근신이란 따로 떨어져 있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였다.

 

깨어있기 위해서도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술주정뱅이 의사가 될 수 있고, 늙어서도 여전히 어떤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일이겠으니.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라.’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의 권능이다. 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듯 주의 양 무리를 돌보며 사는 거였다. 나는 최소한 나의 부모와 형제들의 삶을 보면서도 확신한다.

 

누군 집을 짓고 증축을 하고 어디에 투자하여 얼마의 이익을 남기려고 기를 쓰고 사는 세상에서, 우린 그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이지만 ‘아이’ 생각을 한다. 저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님, 하고 한참을 거기 머문다. 곧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10).”

 

그리하여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11).” 우리로서는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 주의 은혜에 굳게 설 뿐이다.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12).” 그렇게 실제 우리는 서로 문안한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4).” 어찌 지내는가 묻고, 저의 염려를 들어주며 할 수만 있으면 곁을 같이 하며 가는 길이었다.

 

이것으로 두려움을 없앤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산적해 있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를 바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사랑이 곧 우리의 두려움을 쫓나니, 어떻게 주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우리로 오늘까지 살아오게 하셨는지. 저들과 무엇이 다른지. 어떤 구분을 확신하는지.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6).” 이 모든 일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할 때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시 31:7).”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시 48:9).”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