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8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시편 12:3-4
행함과 진실함이란,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애써 생색을 내지 않아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없는 주의 긍휼하심이었으니, 우리가 그러하도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우리는 알기 때문에 마음은 그리 쓰이고 말씀을 준행한다. 성경에서 마음은 곧 영혼의 것으로 풀이 된다.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저 영혼을 두고 나의 영혼이 불편하거나 또는 기뻐하거나. 그래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리 되어지는 마음이었다. 찬송하게 하시려고(엡 1:6),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12), 그리하여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그래서 우리 안의 불편함은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전에는 그저 흘겨듣는가 했더니 누이에게 말한 모양인지, 누이가 아이를 보냈으면 한다고 했다. 아이는 벌써 스물다섯이 되었는데 심한 우울증으로 학교도 그만두고 칩거 중이라 하였다. 어떻게 오겠나, 온다고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나는 이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오게 하실 이가 또한 이끄실 터이니 나는 그저 여기에 있을 따름이다. 보면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무얼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주가 무얼 하게끔 하시는 일이라, 그저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되었다. 집이 너무 먼데, 아무리 그래도 여자아이라 온다 하겠나. 드는 생각을 물리치는 것도 일이었다.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여기에 있다. 오후께 아픈 아이로 인해 어이가 없었다. 일찍 와서 일기도 쓰고 성경공부도 하고 같이 점심도 먹고 올라왔다.
뒷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글씨를 쓰거나 하였는데, 아이가 감정이 고조되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줄 알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이는 그렇게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흐느끼는 것인지. 나는 멀찍이서 아이를 바라보며 기도하였다. 다가가 같이 손을 잡아주고 기도해주어야 하나, 한참을 그리 망설이다 아이 곁으로 갔다. 그런데 그게 어느 가수의 무슨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감정에 취한 것이었으니.
보면 다 저를 위해 나를 두시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저를 두시는 거였다. 그러는 동안 나 혼자 애달파하며 주께 고하고 그 안타까움을 아뢰고 있던 것이었으니. 성한 아이면 뭐라 나무라기라도 하겠는데 나는 허탈한 마음과 함께 묘한 진리를 하나 깨달은 것 같았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 나를 조성해가고 계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이를 알게 하시기까지, 저이를 향한 마음이라. 아이가 돌아가서 한참 뒤에 연락을 주었다. 어디 빵공장에 취업이 됐다는 거였다. 것도 신기하게 오후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만 일한다는 것. 나는 전율하였다. 어디 취업을 알아본다고 할 때 그럼 우리의 만남이 어려울 텐데, 그렇다고 아무데도 안 되길 바랄 수는 없고. 최소한 추수감사주일에 학습을 받고 내년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을 수 있기까지.
혼자 그리 여겨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었는데, 취업이 되었어도 교회에서 가까운 이쪽 어디 공단이라고 하니! 장소와 시간이 절묘해서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보다 신비하고 엄청난 기적이 또 있겠나? 이처럼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할 수 있고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보다 놀라운 사실이 또 있겠나!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었다. 아이가 오는 것이나 그리 되어지는 일에 있어서, 나는 그저 노심초사 마음만 쓸 뿐인데 주께서 이루시고 주께서 다스리시고 계신 것이었으니. 이는 내 안에 주가 계심인 증거이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라. 다 저녁에 뜬금없는 친구의 전화는 하나님이 또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시는가, 궁금하게 하였다. 내가 뭘 한다고, 서울 도봉구 쪽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온다고, 이제 그건 내가 걱정할 게 아니었다.
재밌고 놀라운 사실 하나가 또 생겼다. 6학년 여자아이가 새로 온 것이다. 근데 그 아래 남동생이 먼저 다니고 있었다. 그 왜, 공부 못하는 아이. 혼자 악을 쓰다 울어버리는 아이. 그 성질을 못 이겨 학교에서도 이틀이 멀다하고 담임이 아이엄마를 불러댄다는 아이. 그 아이가 달라졌다. 아직 공부야 여전하지만 더 이상 성질을 부리지 않고, 그렇게 악을 쓰다 울지도 않고, 때론 참아내고 견뎌가는 아이가 되었다. 아내는 그저 잘한다 잘한다만 했고, 글방에 오면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 목록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돼도 않는 기도 제목을 나열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아이 이름과 그 상태(?)를 주께 아뢰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돌이켜 주 앞에 나오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안 믿는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만큼 부모를 대신하여 주의 사랑으로 보듬는 것뿐인데. 물론 그 속이 오죽할까? 누구는 밀린 교육비가 이백만 원이 넘는다. 한데 그 엄마는 미안하고만 하니, 아내는 어쩌겠나? 그럼에도 새로 아이가 온다. 보내시는 일이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우리가 붙들 자세이었다.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아이들을 붙드시고 우리 곁에 두시는 일이라면 또한 하나님이 그 아이를 건사하고 다스리실 일인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우리는 다만 여기 이렇게 두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 그럴 수 있게 하시는 것까지도 주가 그리 하셔야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 4:18).” 그리 되게 하신 일이지 저가 그리 된 게 아니다. 아이는 가요를 듣다 감정이 고조되어 부르르 몸을 떨며 전율하는 것을 나는 저가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에 젖었는가, 함께 기도하였던 일이었으니.
종종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열다섯 소녀의 잉태나, 쉰일곱에 새삼 가족과 자신이 일구어 살던 터전을 두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야 하는 일이나. 그럼에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또한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이보다 더 엄청난 기적이 또 있겠나?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망할 수도 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
곧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시 12:3-4).”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묵묵히 주만 바랄 수 있는 마음이었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주가 이루어 가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장래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그러나 우리에겐 주를 향한 소망이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부디 나의 이 보잘것없는 마음이지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
주의 사랑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곁에 두시는 이들을 마주할 수 있기를. 현재의 모든 염려와 근심까지도 주께 온전히 바쳐지기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 곧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19-20).”
이 모든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이에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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