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18. 10. 17. 07:01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일서 4:12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다. 조금 나아졌다 하여 방심할 수 없고 궁벽하여 그 살림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 하여 괴로워할 게 아니다. 보면 그 모든 일들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신뢰하는 일이다. 이를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서 증명이 된다. 내 안에 이는 마음이 또한 주의 마음이었다. 이 마음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이다.

 

어찌 나의 이 마음을 내가 주장할 수 있을까?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친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나이다(130).” 이제 나는 그 어떤 값보다 더 귀히 여길 줄 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72).” 사모함으로 그 맛을 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10).”

 

말씀으로 두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말씀은 외과 의사처럼 우리 영혼을 찢고 도려내어 덧붙인다. 정신과 의사처럼 돌아보아 직면하게 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구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잘 될 줄 알았다. 잘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서로의 불화와 반목이 도리어 주의 뜻을 찾고 그 부르심에 응하게 하시는 거였다. 때론 그 일이 화나게 하고 고통을 더하고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그건 전적으로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까지도 돌이키사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게 하나님이시었다. 결코 반목과 불화를 조성하신 게 아니다. 그동안 안이하였던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서로를 의지하면 잘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도모하여 잘 된 줄 알았다. ‘~까 하노라.’ 하는 식의 유혹이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우리의 그릇됨은 토시 하나 때문이다. 그렇게 빛보다 어둠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드러날까 서로 숨기며 사는 꼴이 되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실제 빛 가운데 산다는 일은 엄청난 수모와 모해와 견제를 받게 돼 있다.

 

어느 마을에 흑인 가족이 이사를 왔다. 주의 마음으로 저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자 다른 이웃들이 반목한다. 한 경찰이 그 동안 관례처럼 받아오던 사창가의 상납금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자 동료 경찰들뿐 아니라 매춘부들 사이에서도 적개심을 가졌다. 여느 영화의 소재처럼 늘 그런 식이다. 이때 말씀은 뒤로 물러서지 말라고 하신다. 어쩌면 나이든 시므온이 예수를 보고 그의 어머니께 한 말과 같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마 2:35).”

 

우리가 예수를 내 안에 모시고 산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만큼 엄청난 용기와 고초는 없다. 그래서 스스로 억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DNA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이를 위장하여 더욱 표독을 떠는 것이다. 그리 못되게 구는 것이다. 서로를 견제하고 묻어가며 덮어놓으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때 성경은 우리를 바로 알게 하신다. 나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 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일련의 상황을 돌아보며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필리핀 동생의 사정과 또 다른 인도하심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러게. 누구 말처럼 참된 기독교는 싸움이다. 날마다 전쟁이다. 이는 그리 될 수밖에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우리의 숙명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로 인하여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나는 요 며칠 어머니 마리아를 묵상하였다. 구원의 경로가 되는 듯하다. 찾아오셨고, 이를 받아들임으로 그 역사는 이루어졌다. 회개와 복종이라고 하는 우리의 내적싸움은 이 땅에 사는 끝 날까지 계속되는 거였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는 듯 하리니’ 하는 시므온의 말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기쁨이라니! 말씀이 되셨고,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일이라.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에게 두시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2).” 이처럼 말씀으로 비춰 일상을 반추하고 돌이켜 주를 더욱 사모할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끝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그 뒷모습만 보았던 모세와 달리 우리는 날마다 그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내 안의 충만함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고난이나 역경은 선체의 평형을 맞추기 위해 맨 아래 칸에 실었던 짐들과 같다. 어딜 가나 늘 짐스러운 것들로 인해 우리는 힘들어하면서도 그것이 평형수가 되어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어려움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필리핀 동생에게 주어진 일련의 상황들이 그런 구실을 한다고 본다. 부모 된 마음으로 안 됐고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어서, 그저 잘 되고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겠으나! 나는 아버지와 통화를 끊고 오래도록 먹먹하였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다 알지 못했다. 저들 부모와 형제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막 3:33).”

 

온전히 주의 뜻을 안다는 것은 교만뿐이다. 우린 다만 말씀 앞에 겸손할 따름이다. 내가 하나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가시가 우리 마음을 찌르는 듯하다. 한데 그 향기가 짙고 고요하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그 기쁨은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였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그리하여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그의 충만함으로 산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7:13).” 곧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시고 있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어찌 알고 믿을 수 있겠나? 우리 안에 두시는 기쁨이라. 그 사귐이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이 끔찍한 현실까지도 기쁨으로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물론 염려와 근심이 먼저 우리를 옥죄고 마음을 어지럽혀 답답하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랄 수 있는 것.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이렇게 말씀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6).”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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