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세기 20:13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편 57:2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겠다.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것은 흉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함이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로 끌려 다니는 일이 어쩌면 마땅한 일인지도 모른다. 부르심을 받았고 이에 응하여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번번이 우리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으려하는 건 아닐까? 마치 지금에 와서 나는 의연하고 모든 것에 온전히 주만 바라고 말씀으로만 붙들려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굴지만 실은 남모르게 발버둥치는 꼴이 때론 자책으로 나를 짓누른다.
아직 어리고 젊은 동기 내외의 이런저런 사연과 갈등 앞에 나는 송구하였다. 나의 3, 40대가 그래서 외면과 부정으로, 거절과 미뤄둠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그때마다 때론 기적적으로 하나님은 돕는 손길을 통해 또는 어려운 현실을 동원하여 다시 부르시고 주 앞에 세우시려 할 때마다 나는 마치 필연적으로 그럴 수 없는 이유와 근거를 들어 미루거나 멀리 돌아서 피해 다녔다. 그랬던 사람이 한참 젊을 때 쪼들리는 환경에서 자식들을 건사하며 먹고 사는 문제와 씨름하는 것을 두고 뭐라 하기는 좀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구책이 번번이 걸림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저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궁여지책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창 20:13).” 사라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놓지 못할 소중함이다. 자식이거나 학업에 대한 열의이거나 나름의 소신이거나 더 나은 충심을 담보로 하는 확신이거나.
그것까지는 하나님께 맡길 수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자구책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구제하기 위한 방책’이다. 방책은 어떤 일에 꾀를 내거나 방법을 세우는 일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주 앞에 확신을 욕구한다. 응답을 바란다. 어떤 가시적인 보증을 원한다. 하나님으로는 자신이 안서는 일이어서 말이다. 누구 연대 보증을 세우거나 담보를 달라는 것인데, 종종 우리는 이를 마치 숭고한 ‘기도 응답’ 내지는 ‘주가 주시는 확신’으로 놓는다.
한데 가만히 보면 결국은 못 믿겠다는 소리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에 대해 미덥지 않은 마음이 자기 확신을 이유로 미루거나 좀 더 두고 보자는 것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게 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여건 때문이다. 애들은 아직 어리고 모아둔 재산은 없고 다달이 나가야 하는 공과금은 늘어 가는데, 그럼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라’가 눈에 띄게 아름다워서 좋은데 그것으로 행여 자신이 위태로워질까 봐!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엄마로서, 어찌 이 모든 것을 주께 맡긴담? 왠지 무모한 것 같다. 그러니 신중함을 들어 미적거리는 것이다.
응답을 운운하면서, 확신을 바라면서,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스스로 방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딸애가 사귀는 전도사가 인사를 왔다. 하필 동기 내외의 일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때였다. 뭐라 자꾸 반대만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싫은데 좋은 척 할 수도 없고. 나는 주님께 그럼 내 마음에 기쁨을 달라고 구하였다. 그것이 무얼까? 딸애가 좋아한다는데 헤어지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부럽지 않은 조건과 형편을 구가하는 상대를 바라는 일일까?
나는 저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같이 성경공부를 하자고 했다. 어찌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가는가, 보여 달라고 하였다. 교재가 있고 그 공과책으로 맡은 파트 사역을 감당하는 일은 헐겁다. 그것으로 말씀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씨름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마치 반찬가게에서 다 만들어진 찬거리를 가져다가 상을 차리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앞서 동기 내외에게도, 그리고 인사를 온 딸아이 남자친구에게도 나는 이제 권할 수 있는 게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이는 그냥 그래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이라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그 움킨 것을 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으르렁거리며 뜯어 먹는 사자와 같은 것이다. 죽어도 놓지 않는, 다 잃는다 해도 이것만은 빼앗길 수 없다는! 그것이 우리에겐 말씀이어야 하지 않을까?
맡기신 성도들을 양육하고 저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겠나? 하고 동기가 대답할 때 나는 그것까지도 우리 일은 아니라고 과감히 말해버렸다. 우린 그저 씨 뿌리고 물을 주는 것뿐이지 햇살을 만들 수 없고 각종 삼투압과 자양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할 수는 없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우리는 마치 종일 주방에서 싱싱한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하는 주방장처럼 말씀을 붙들고 다져 먹을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성도들이 어찌 씹어 삼키든 뱉어내든, 먹어서 어떻게 골근육이 발달하고 건강하게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필연적인 사투는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내가 먼저 녹아져야 한다. 종일 그렇게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여서 먹기 좋게 차려놓았는데 아무도 먹을 사람이 없다고 하면, 그건 주방장의 일이 아니다. 홀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이나, 이를 홍보하여 여기저기 알리는 사람이나, 각기 우리에게는 믿음의 분량대로 맡기신 사역이 각각이었으니. 최소한 나는 저가 목사로 전도사로 세우심을 입었다면 정치나 경영은 주 업무가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 꼴을 먹이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부르신 이가 또한 그 모든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인데, 미덥지 않은 마음은 스스로 방책을 세워 ‘아내를 누이라’ 하듯 다른 일을 모색하고 어떤 환경을 새로 꿈꾸면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어떤 낭만을 찾아 사역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뒤늦게 친구 가운데 하나도 기껏 평신도 선교사로 나름 ‘하와이’에서 3, 40대를 선교하다 신대원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으려고 귀국하였다. 나는 저가 그동안 어떤 역할을 했고 하나님이 저를 어떤 일로 사용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저의 궁색한 설명은 ‘목사’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더라는 것이다. 애써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목사가 아니어서 걸림돌이 된다는 소리였는데, 나는 그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아는 목사는 아주 단순한 기능직이다. 대외적인 얼굴이 아니라, 들어앉아 식재료를 다듬는 주방장처럼 주어진 말씀을 썰고 다져 뭇 영혼들이 먹고 마시기에 적합하도록 식기에 담아 내어주는 사람이다. 저가 들고 홀로 나다니고, 대외적으로 누굴 만나서 정치를 하고 경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래서 목사는 누가 몇 명이나 모이는지,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고 쓰이고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길과 같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상의 믿음을 함축하는 인물이다. 왜 자꾸 저런 소릴 하나, 하는 사람들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붙들렸다는 건, 부모 자식도 버려두고 따르는 길과 같다. 그러니 그게 말이 되겠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겠나? 그런데도 그리 또 된다. 하다못해 이 땅을 살면서도 무슨 대의를 추구할 때 ‘그것들까지도’ 사사로이 여겨 뒤로 하는 게 마땅하였다.
나는 딸애가 만나는 전도사에게 말씀으로 붙들려 말씀으로만 사는 것을 요구하였다. 구구한 사연으로 발목을 잡힐 일이면 애당초 갈 길이 아닌 것이다. 자신만 고달프고 처자식만 고생시킬 문제다. 동기 내외에게도 그리 당부하였다. 의당 쉽지 않은 길이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주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자리다. 이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거룩이라 하였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거룩이라,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 종목, 기록에만 한평생 최선을 다하는 것을 저들은 거룩이라 하였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한 것이지만 더욱이 목사로 산다는 일은 필연적인 숙명 같은 게 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룩하니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겠으나 그 가운데서도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악착같음이 필요하였다.
오늘은 주일 예배 후에 그 동기 내외가 오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일찍 눈을 떴다. 나에게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는 것이 이처럼 묵상글을 쓰며 말씀 앞에 앉는 일이었다. 그냥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 어딜 가야 하는 날에도, 어딜 가서도, 무얼 하든! 더는 앉을 수 없고 손을 쓸 수 없고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여 문자로 정리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기 전까지는! 모든 하루의 우선이 되었다. 그 유익은 여러 것으로 파생된다. 묵상글을 다시 읽으며 되새길 수 있는 유익은 물론 그것을 위해서도 책을 읽고 누구의 성경 연구를 집중하게 된다. 메모를 하는 이유가 되었고 생각의 틀을 맞추는 이유가 되었다. 최소한 묵상글을 쓰는 것처럼만이라도 살 수 있기를.
곧 이제는 말씀을 먼저 붙들고 나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다음 걸음을 뗄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은 날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과 같고, 누구에게 전하여야 할 말씀을 준비하는 일과 같으며, 내게 늘 들려주고 일컬어 나를 먼저 바로 세우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를 강박이라 하든, 습관이라 하든, 공연한 자기만족이라 하든 개의치 않는다. 누가 보든 또는 동조를 하든 안 하든 이 또한 이젠 상관이 없다. 때론 그냥 하는 것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내 일이 되었다. 이를 결코, 그 어떤 것 때문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내가 이해하는 정도의 목사란, 목회란, 사역이란 먼저도 말씀이고 나중도 말씀이다. 내 곁에 두시는 사람도 성도도 나의 건강도 이 우선순위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평생 그러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그 일로 족한 것이어서. 나는 좀 과감하게 동기 전도사에게, 딸아이 남자친구 아이에게 이를 강조하였다. 교회를 위하고 한 영혼을 위하고 나를 위하고 인류 공영을 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으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를 어찌 알까? 저의 말씀 앞에 붙들리는 것이다. 마리아처럼 그 하나로 족한 것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내게 두시는 확신은 이에 기인된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중요하고 그 은총과 자비하심도 중요하나 그 모든 것보다 우선이 결국은 하나님이신 것처럼.
때론 응답이 없고, 어떤 확신도 주어지지 않고, 그래서 너무 막연하여 무모하기까지 하지만 그런데도 출렁거리는 요단에 발을 딛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내 살 궁리로 내가 어찌 모색한 길은 여지없이 더 큰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하나도 이뤄진 게 없는 것 같고 더 일이 꼬여드는 것만 같아도, 하나님으로 된 것이다. 내가 이처럼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의 허리 통증도 때론 외로움과 고독함도 모두 부수적일 뿐이다.
더는 이 움킨 것을 놓칠 수 없는, 그래서 필사적인.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하는 이 말씀을 오늘 오후에 방문하는 동기 전도사 내외에게 들려주어야겠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어떠하든, 여건에 따른 게 아니라, 나의 자구책으로 인한 게 아니라,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나를 깨우리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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