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전봉석 2018. 12. 4. 07:1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세기 22:8, 14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편 59:17

 

 

가끔은 이게 뭐지? 싶을 때가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거두절미하면 이보다 잔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는 모두 “그 일 후에” 일어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1).” 그리 감당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3-4).” 나는 종종 저의 삼일 길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괴롭고, 초조하고, 갈등하였을까? 설마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여기서 한 가지, 저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데 주목한다. 미적거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마음은 어떠하든 몸을 이겨냈단 건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사무엘 같은 사람도 보내셨고, 바로와 같은 이도 붙이셨다. 어떤 복잡한 일 앞에서 종종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어릴 적에 나는 수술을 하였고, 여수 애양원에서 서너 달을 기거한 적이 있었다. 저는 촉망받는 인물로 인류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나병이 들었고 시력을 잃었다. 소록도로 끌려갔다가 소경이 되어 애양원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소경이 된 뒤 저는 성경 66권을 다 외웠고, 앞을 더듬으며 병원이나 인근 숙소를 드나들며 성경을 가르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였으니까, 어린 나는 저의 푹 팬 눈두덩이가 무서웠고 곱은 손끝이 어려웠다. 저는 매일 나의 숙소에 들러 성경을 읽게 하였고, 내가 더듬거리며 잘못 읽을 땐 짙은 선글라스 너머에서 다 보고 있는 듯 바로잡아주었다. 훗날 나는 어른이 되어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저를 방문하였고 구리구리한 저의 숙소에서 기도를 받았다. 또 어떨 때 누굴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고, 하는 식으로 나는 끝도 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내 곁에 두신 인물과 사건으로 인하여,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 때론 막연하여 두려움만 앞서고, 내 안에 싫고 좋고의 감정을 숨기느라 장황한 설명을 이어가야 하지만. 이렇게 눈을 들어그곳을 바라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그 모든 게 적절하였다. ‘그 사람’ 혹은 ‘그 사건’만 떼어 생각하면 참 모질고 냉혹하기까지 하지만 앞뒤 이어지는 상황과 사실들 앞에서 우리는 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그리 결행을 한 것도 그럴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사는 것이다. 주신 날이 어떻던, 그 처지가 어떻던, 뭐가 서럽고 원통하고 괴롭기 그지없다 해도 온전히 사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또한 우리의 의무는 자라가는 것이다. 저가 우르를 떠나 바로 이삭이 생겼다면, 이런저런 우여곡절 없이 바로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다면 과연 아브라함이 그리 준행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자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어떠하든 그 생을 온전히 살면서, 이런저런 여파에 시달리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곧 이렇게 평생을 우리는 은연중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꿔서 생각하면 나는 때로 누구에게 사무엘이었다가 또는 누구에게 바로가 되기도 하면서.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 8:30-31).”

 

우리 인생을 이보다 정갈하게 서술한 문장은 없을 것 같다. 어떠하든지 우리 모든 산 것들의 의무는 이내 살아서 산 사람으로 그 일생을 주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에 아이가 쓴 글을 다듬어주다 생각하였다. 아이는 직업훈련을 받는 동안 ‘우수 훈련생’으로 뽑혀 돌아오는 토요일에 시상을 하고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할 소감문을 썼다. 나는 아이의 문장을 고르고, 주어와 서술어를 가지런히 놓아주다가 내가 어릴 적 언젠가 더듬거리며 성경을 틀리게 읽으면 다시 읽으라며 바로잡아주던 소경 장로님을 생각하였다.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없다. 아이는 뿌듯해하였고 나는 기뻐서 칭찬해주었다. 성실하게 임하여서 저들 사이에 ‘우수 훈련생’으로 뽑혔다고 하니, 훗날에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이라 하면, ‘내가 그 곁에 있어서,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는 것이다.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며 사는 일이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었다.

 

한데 우리는 실제 어떠한가? 가소로운 것이다. 고작 그런저런 장애인들이 모여 직업 훈련을 받고 그 가운데서 조금 나았다고 우수상을 수여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처음에 안쓰러움으로 또는 가소로움으로 기뻐하는 시늉만 하였다. 한데 아이의 글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고, 그 순수한 마음이 혼탁한 나의 영혼을 맑게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다듬고 정제된 글이지만, 아이의 발표문을 가져왔다.

 

“우선 저를 우수 직업훈련생으로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평소에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편한 대로 생각하고, 편한 대로 대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항상 성실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제 의지를 믿고 직업훈련을 받았습니다. 직접 말씀은 못 드렸지만 그동안 관심을 가져 주신 선생님과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사람들과 어울릴 때 난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직업 훈련 친구들과 같이 배워나가야 한다는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들 일할 때 환경을 중요시 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환경을 탓하지 않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어머니의 도움과 헌신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더욱 성실하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때론 제가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들 저를 응원해주시고, 먼저 웃어주시고,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다짐은 서로를 존중하고,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며, 소통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고, 서로 이끌어주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세요. 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은 직업 훈련생 김**였습니다. 끝~”

 

실은 아이의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처음 글이 더 감동적이다. 이를 옮겨오지 못하는 것은 앞뒤 문장이 장황하고 도통 무슨 말인지 이어지지 않아 서너 번을 같이 다듬은 것이다. 최대한 아이가 한 말을 살렸다. 나는 기뻐하는 아이와 함께 기뻐했다. 그의 곁에서 내가 저에게 저가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사무엘인가? 아브라함인가? 다윗인가? 과연 어떤 인물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어떠하든,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어 주신 날을 묵묵히 살아가는 의무를 다하고, 그러는 동안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아이로 인해 내가 더 배우는 게 많다. 웃음이 많아졌고, 정말이지 호탕하게 웃어 제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꾸밈이 없고 어떤 다른 숨김이 없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문득 그런 우리에게 지혜자는 경고한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다소 생경한 소리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조심하라니! 교회를 가는 데 내 발을 삼가하라니! 도대체 무얼 주의하라는 것일까? 문득 나는 아이를 전심을 축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였다. 고작 ‘우수 훈련생’으로 뽑힌 걸 가지고, 하며 우스워했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위선과 자기 판단이 문제였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2).” 아이의 글을 읽고 아이가 정말 기뻐하고 감격해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별 거 아니라고 여긴 것이 송구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죄였다. 그렇듯 예수님은 고작 어린아이와 창녀와 세리와 불구자들과 기뻐하셨는데 말이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3).” 생각이 많다는 건 그만큼 오만함의 증거이다. 미루고 있는 나태이고 시간을 좀 끌면서 기회를 엿보려는 사욕이다. 그렇듯 걱정과 근심에 생각이 많아 말도 많은 나에게, 오늘 날 아이의 존재는 내 안에서 우매한 소리를 듣게 하는 스피커 같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막 13:21).” 온갖 소리에 기웃거렸을 텐데, 하나님은 내게 귀 기울이게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8).” 그 아들을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하신 시점에서도 아브라함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 결국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이는 신앙의 만국 공통어인가보다. 하나님이 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옳으시다.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도, 정말 끝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에게는 드릴 수 있는 고백과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으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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