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창세기 30:43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부사 ‘이에’는 ‘이와 같은 까닭에’로 앞서 인위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야곱 특유의 수고하고 애쓰는 일의 결과로 이어진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43).” 이를 복이라 여겨 그래도 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야곱을 ‘그 사람’이라 지칭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로 인해 파생되는 저의 인생의 굴곡을 우리는 앞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복이라 여기는 것과 성경이 복이라 의미하는 그 차원이 다른 것 같다. 한 청년이 있었다. 예수님은 저가 선하고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해 사랑스러워하셨다. 저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저는 영생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바르게 찾아왔고 옳은 대상에게 물었고 그 대답을 들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그럼 기꺼이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악을 행하지 않았지만 선을 행할 수 없는 삶도 있는가 보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여 얻은 결과이지만 그것으로 근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로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단절시키는 모든 것은 악이다. 재물이 악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과 불화하면 죄이다. 만일 재물 그 자체가 악이라면 이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하셨겠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홀가분할 수 있는 게 복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
아이가 요즘 생각이 많다. 모든 이들의 관심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나도 생각이 많다. 다들 ‘아픈 아이들’이라 어디까지 친절하고 어디까지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 뭐라 아이에게 이르기가 쉽지 않다. 혹시 몰라 그들 전화번호를 알아두었다. 심지어 복지관 선생의 번호도 가지고 있기로 하였다. 녀석은 당돌하게 정의하였다. ‘복지관에서는 자신이 우수한지 몰라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바닥이다.’ 어찌 그런 표현을 쓰는가 하고 뭐라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려운 일이다.
아이가 돌아가기 무섭게 친구가 왔다. 조카아이가 예전처럼 ‘눈이 풀렸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았다. 사귀는 아이가 신고를 하여 경찰서에 잡혀갔고 무슨 환각제를 복용하여 구류를 살았던 모양이다. 그것으로 온 가족이 근심하고 있었고 그런데 아무도 그 애가 어디서 사는지 무얼 하고 사는지 알지 못했다. 다들 아이가 문제라고 탄식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족들이 모두 너무하다, 하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걱정한다고 하면서 너조차 그 애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물었다.
이런 날이 있다.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의 일 년 만에 한 녀석이 전화를 하였다. 기껏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난여름 아예 자퇴를 하고 칩거 중이라고 하였다. 두문불출, 먹고 노니 피둥피둥 살만 쪄서 비만이 되었다. 그것이 부끄러워 또 밖을 나가지 않고, 나가지 않으니 점점 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곳에는 갈 수가 없고, 갈 수가 없다는 이유로 들어앉아 먹고 자고만 하는 것이다. 무려 열 개가 넘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지혜자는 즐거움을 살펴보다(전도서 2장) 학대를 살펴본다(4장).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 내게 두시는 일련의 사연들을 놓고 나는 말씀 앞에서 주춤하였다. 아이에게 좀 올 수 있겠나? 물었더니 지하철을 탈 수 없다고 했다. 그럼 내가 가랴? 하고 물었더니 사람들 많은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 우리의 나태보다 무서운 수고가 또 있을까? 건강한 사지육신과 적당한 부모의 외면과 돌봄이 아이를 점점 더 나태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스물넷, 나는 아이의 꽃다운 나이를 시기하였다. 먹는 걸 자체하고 산보부터 시작하여 운동을 좀 해야 하고, 체중을 줄이고 한 번 두 번 사람들 속으로 나와야 한다고 일렀다. 그래도 녀석은 실실거리며 건성으로 네, 하였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5).” 그러니 차라리 모자라고 궁핍하여 주의 도우심으로 근근이 사는 가난이 더 복이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13).” 내가 어쩔 수 없는 지점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듯 자꾸 한숨만 내쉬었다. 친구에겐 무슨 말로다 위로를 줄 수 있겠나? 오후께 집에 돌아간 친구가 다시 전화를 하였다. 조카아이와 통화를 했다면서 다음 주쯤 같이 오겠다고 하였다.
보면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 부모와 가족의 내력을 살펴야 한다. 저들은 이혼하여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 몰라라 하고 어디 시골 공장에서 일하고 산다. 아이엄마는 기껏 아이와 같이 해볼 수 있는 일거리를 술집으로 삼았으니, 출소한 후 아이는 며칠 같이 일하다 ‘남자들이 엄마를 대하는 태도’에 못마땅하여 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혼자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며 지내는지,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그러다 툭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면 갑자기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난다.
차마 나는 다들 너무 적당하여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이 사는 남자와도 그럼 혼인신고를 하고 주님 앞에와 사람 앞에서 반듯하게 살아야지, 하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만두었다. 이제 와서 무슨, 하며 전에도 발끈했던 걸 기억해서이다. 그저 자랑은 가족 누가 어디에 취직을 했고 돈 잘 벌고 요즘 이렇게 잘나간다, 하는 소리인데. 이내 늙으신 부친은 내달부터 투석을 시작해야 할 것 같고 모친은 안절부절 마음만 끓일 따름인데.
지혜자는 우리에게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하였다. 이는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그래서 더하신 가족이고 교회인데 다들 그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적당히 가까워야 편하고 적당히 멀어져야 안도하는 것이니. 조카아이 일로 늙으신 부모는 물론 자신도 걱정이 태산이라는 말에 ‘하나하나 풀어야 하는 실타래가 너부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다 저녁에 다시 통화를 길게 한 아이와의 대화에서 답이 나왔다. 밖을 못 나가겠으면 우선 안에서부터 해라. 먹는 걸 줄이고 움직이는 걸 늘리며, 가족들이 모두 출타하였을 때 집안일을 하면서 붕괴된 유대관계를 하나하나 복원하면서 집 앞 공터에서부터 조금씩 산책을 하고 운동도 하고. 나의 말은 잔소리처럼 늘어났고, 그리하여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을 때 내가 가든 네가 오든 어디서 만나든 하자 말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었다.
늘 내게 두시는 마음이라. 누가 누굴 사귀고 무슨 일로 서로 근심에 사로잡혔으며 어떤 일에 연루되어 일이 복잡하게 꼬였든지, 엉킨 줄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아예 끊어버리거나 그럴 수 없다면 한 줄 한 줄 하나씩 천천히 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밤낚시를 하다 두 대의 낚싯줄이 엉켰을 때 이를 푸느라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씨름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싫으면 어쩔 것인가? 이제 스물넷. 스물둘. 스물셋. 아, 저 싱그럽게 아름다운 나이를 어쩌면 좋을까?
왔다 가는 게 다 같은 이치인데,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5:15).” 아등바등 돈돈거리며 사는 꼴이 다들 가관이라. 그래봐야 어쩐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17).” 우리는 다 한 곳으로 돌아갈 뿐이라.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6).”
그리 축적한 부귀영화로 말미암아 이고 지고 살아야 하는 세월이 무거울 따름인데, 적당히 떨어져서 마음만 근심으로 시늉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자꾸 한숨만 내쉬었다. 뭐라 한들. 기도할게. 기도해라. 나의 말은 무상하게 울렸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1-12).”
오늘 나는 말씀에서 야곱의 수고와 애씀이 앞으로 이고 져야 할 무게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43).” 그것으로 복되었나? 복되게 하시는 이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그 인생이 고단할 따름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 결국 우리의 복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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