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전봉석 2018. 12. 13. 07:23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창세기 31:49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편 68:6

 

 

‘미스바’는 기도와 대각성을 떠올리게 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하고 경계를 세운 곳이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삼상 7:6).” 버리고(3), 향하고(3, 8), 모이는(5-6) 훗날 기도의 장소였다.

 

하나님과 겸손하게 걷고 행동하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곧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일이어야 했다. 날마다 크고 작은 일이 터지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였다. 초딩 5학년 아이가 자기 분에 겨워 책을 던지고 욕을 하고 울음을 토했다. 그 애가 어떤 앤지 알고 있어서 나는 아내에게 또? 하고 물었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루 일과를 서로 들려주며 그것이 예배로 드려지는 기도가 되었다. 이제 스물셋. 한참 그럴 나이인데, 아이 곁에 서너 명의 여자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갑자기’ 이성에 대한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이틀째 고백(?)을 들이대며 문자를 하였다. 어떻게 해야 해요? 하는 아이의 말에 난감하여졌다. 아무리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경우들이라 해도 감정이 있고, 이를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그저 그러려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혹시 몰라 일일이 저들 전화번호를 내 것에 저장하였다. 복지관 담당 선생의 것도 적어두었다. 너는 어떤데? 하고 묻는 나의 질문이 우문처럼 여겨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감정이 누가 뭐란다고 해서 물리고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 이모란 인물은 하긴 걱정과 우려가 앞설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자신들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하는 말로 받고, 행여 ‘무슨 일’이 생겨 서로 임신이라도 시키면 어쩌냐, 하는 식으로 너무 앞서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말해주는데 내 말이 우습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아이엄마의 심려와 우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앞으로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하고 되뇌면 한숨만 짓게 하는 것이다. 졸지에 성교육과 이성교육을 시키듯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당부를 하는 것밖에. 다행인지, 이번 주 금요일에 복지관도 종업식을 하고 방학이라고 하니 당분간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을 때, ‘보고 싶으네요.’ 하는 한 여자아이의 문제가 들어왔다. 카톡 그 페이지에 여섯 번 삭제한 글 뒤에 쓴 말이어서 더 마음이 심란하였다.

 

아이엄마와 통화를 해야 할까 하다 그 이모와 통화를 한 것인데 저 극성이니, 자꾸 가르치고 주의를 주고 무엇보다 주의 인도하심을 바랄 수밖에. 그리 일러 단속하였고 통화는 쓸데없이 길어져 같은 염려와 우려가 맴돌았다. 이럴 때 나는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처신이 어렵고, 마음이 안쓰러워 자꾸 아이가 안 됐다. 꼽추인 친구 하나가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시인이 되어 어느 특수학교 주무관으로 일하면서도 여태 결혼을 못하고 혼자 사는 것이 같은 맥락의 이유가 아니겠나.

 

‘지들이 뭘 안다고!’ 하는 식의 반응에 대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이르는 내 말이 더 힘없이 들린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본의 아니게 자꾸 아이의 일에 관여하게 된다. 내가 저들 전화번호까지 갖고 있게 된 건 너무한 것도 같다. 그러니 아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물으면 난감한 것이다. 하라 마라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서, 넌 어떠니? 하고 묻는 나의 말이 고작이라.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하는 식의 조언은 미안한 일이었다.

 

어릴 때 들르곤 하던 특수아동들 보육원에서 실제 성인이 된 아이들을 임의로 불임수술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몰래 피임수술, 단종수술을 시켜서라도 관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과 이를 인권유린으로 반대하는 입장 간에 주장은 부딪쳐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였으니, 나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어려웠다. 나 역시 중3, 고1 때라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싶었는데.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들이’ 하는 누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떠나 오늘 바로 내 앞에 두신 일이라. 나는 아이에게 어찌해야 할지 어렵다.

 

때론 이와 같은 일상과 말씀 앞에서 침묵하는 것도 언어다. 말로 다하지 못한 소리 없는 말이 묵상이 되어 주께 묻는다. 괜히 말을 꺼냈나싶게 아이 이모의 극성스런 반응을 애써 다독이고 설득하여 염려를 가라앉힌 뒤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바깥 날씨가 찬데 실내 햇살은 따가운 글방에서 나는 마음이 어지러워 침묵하였다. 다 저녁에 아내는 늘 같은 말로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우리에겐 날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 이를 가벼이 여기고 말면 또 그만일 일들이 때론 무겁다.

 

‘기억하라.’ 하시는 전도서의 말씀이 가슴에 얹힌 듯하였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 무얼 말인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 이와 같은 날과 때는 지나갈 것이니, 더는 오지 않을 때에 한탄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강력한 한 마디,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더는 후회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오나니, 그러기 전에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찌 인도하시고 어떤 사명으로 부르고 어떤 일을 맡기셨는지.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그러나 공허한 말로 들리겠으나, 하나님만 바라자. 하나님을 의지하자. 주가 가장 선히 인도하심을 붙들자. 아이이모에게 절실하게 들려주었던 말이 고스란히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되었다.

 

때론 잠잠히 침묵함으로 더 많은 말을 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괜히 마음은 심란하여 창가를 서성이고 책상을 정돈하고 물끄러미 한 곳을 시선 없이 응시하면서, 슬픈 것도 같고 답답한 것도 같고 안쓰러운 것도 같고, 알 수 없는 여러 마음에 어지럽기만 한 하루였다. 앞으로 아이가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긴 한숨과 함께 주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우리 사람의 본분은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헛되다는 것.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 그러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 내가 일러주어야 하는 말이 아니겠나? 무조건 해라, 하지마라, 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 할 것이 아니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0).”

 

다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헛될 뿐이다. 전도서를 소리 내어 읽으며, 말씀이 없었으면 어쨌을까싶은 마음에 안도하며 위로를 얻었다. 내 안에 이는 이 또한 근심도 실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주께 내어드리는 수밖에. 다만 내 곁에 두시는 날 동안에 아이로 인해 나는 더욱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초딩 5학년 여자아이의 성질머리를 아내가 다스려야 했다. 울렸다 웃겼다, 야단을 쳤다가 위로를 하였다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리바’의 경계다.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창 31:49).” 옳고 그름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어서, 우리는 다만 주 앞에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옵소서.’ 하는 자리이다. 날마다 놓아두시는 자리가 말이다. 그리하여 저녁마다 우린 그곳에 모여 주께 바란다. 서로 말하고 위로하며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로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러므로 정결할 수 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누구를 뭐라 하고, 어떤 영혼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날마다 가정예배를 쌓는 것이다(삼상 7:6). 이로써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하시는 말씀 앞에 선다(3).

 

또한 “우리를,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며 주께 향한다(8). 곧 “모이라.” 하는 말씀과 고로 우리가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는 심정으로 “모여”, “거기에서 이르되” 먼저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 됨을 아뢰고, “다스리니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5-6). 이를 위해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일갈한다.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6).”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때론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이니,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16).” 우리가 안다고 여겨, 나름 정상인 것처럼 구는 것들로부터 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34).” 주의 영광을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