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창세기 38: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편 75:1
그런 거 보면, 이상하다 싶어 살피면 영락없다.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자기가 좋은 ‘아둘람 사람 히라’와 어울렸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되려니까, 거기서 ‘가나한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낳았다. 모든 게 무난하고 순탄하여 별 탈 없는 인생인 듯 보였다. 아들을 위해서도 이방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삼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그러진 길을 바로 잡으신다. 이에 그 은총은 다말에게서 주의 계보를 이으셨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오래고 느린 길을 걷다보면 기다림보다 손쉬운 쪽을 택할 때가 있다. 그러는 게 또 합리적인 것 같기도 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성급히 일을 추스를 때가 있다. 길고 지루하고 막연하고 속절없는, 터널 같은 때에는 더욱 그렇다. 묵상은 그 긴 시간을 견디게 하고 일구어 같은 흙을 밟으며 농작물의 때를 기다릴 수 있게 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게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시간을 경작하고 개간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 여겨지는 하루였다.
섣불리 내가 무얼 추구하고 건사할 게 못 된다. 두시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면서 묵묵히, 묵상은 같은 일상 중에서 거듭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영원을 다스리는 훈련이기도 하겠다. 그 지난한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증명하신다. 오네시모에 대해 읽었다. 저는 빌레몬 가정의 종이었다. 빌레몬은 바울과 친분이 깊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저는 날마다 모여 주를 바라며 교제하였을 것이다. 그 일을 시중 든 종으로서 오네시모는 환멸을 느꼈던 것일까?
도망쳐 로마로 갔다. 골로새에서 로마까지 향하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항구도시 에베소까지는 도보로 5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야한다. 거기서 배를 타고 갔다. 도망친 노예는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다. 잡히면 심한 고초를 겪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때 로마 감옥에는 바울이 갇혀 있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저를 위해 서신을 썼다. 하나님을 만나 용서를 받은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해야 했다.
바울은 저에 대해 빌레몬에게 썼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몬 1:11-12).” 오네시모의 뜻은 ‘쓸모 있는 사람’이다. 결국 저는 주후 68년에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바울은 저를 동역자로 삼았다. 갇힌 중에 나은 아들로 표현하기까지 하였따.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10).”
매일 아이가 오다 안 오니까 갑자기 헐렁해진 시간이었다. 누가 찾아왔는데 처음 옆 사무실에 있던 강 대리였다. 그저 인사만 나누고 종종 안부를 묻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뇌병변 조카아이 돌보미를 맡아 일한다고 하였다. 전신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스물두 살의 아가씨였다. 전국을 돌며 장애인 체육대회에 나가고, 이를 기록으로 나라에서 지원을 받고, 그 일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근황이었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조카만 볼 땐 몰랐는데 다들 모인 그 시설의 장애우들을 건사하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어요. 저가 술술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너머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였다. 얼추 일 년 만에 보는 것으로 잠깐 옆 사무일에 어떤 일을 돕기 위해 왔다가 들러 들려주는 말치고는 그 무게가 달랐다. 여기만 오면 보물창고처럼 자꾸 열어보게 되네요. 저는 혼자 이어가던 말을 그칠 때면 그리 추임새를 놓듯 혼잣말을 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또한 깊었다.
또 오시라, 인사하고 돌려보내면서 그야말로 나는 하는 게 없는 듯한데 하나님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을 또 꾸미시는 것일까? 혼자 생각이 들었다. 오네시모는 그렇게 두기고를 만났다. 골로새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골 4:9).” 그는 이제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 되었다. 두기고는 ‘행운의 아이’라는 뜻을 가졌다.
감옥에서 바울의 편지를 나르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이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 6:21-22).” 붙잡히면 목숨을 잃을 때였다. 영화 <바울>을 보면 더욱 숨막히게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압제는 극에 달하여 그리스도인을 잡아 밤거리의 횃불로 걸어두었다.
훗날 디도에 이어 그레데에서 목회를 하였고,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딛 3:12).” 에베소교회에서 사역하였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딤후 4:12).” 일련의 흐름을 읽으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찾아와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 이상의 근황을 풀어놓고 돌아갈 때도 저의 이야기가 그 안에 내포하고 있을 ‘하나님의 일’을 집중하게 하였다.
겅중거리며 읽는 독법이지만 종일 책을 뒤적거리다 성탄절 전할 말씀과 마지막 날 전할 말씀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또 누가 일러 요즘 경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탄을 하듯 늘어놓다말고 ‘여유로워 보이는’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뭐가 어렵고, 어떻게 물가가 들썩거리고 경제가 어떻다는 따위의 것에서 나를 한 발 비껴 세우신지 오래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읽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다. 누구 눈에는 아내의 수입에 등지고 딸애의 봉양에 안주하면서 ‘팔자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것도 개의치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마다의 역할과 그 사명을 맡기셨다. 어떤 선함과 의로움도 강조할 수 없다. 누구로부터 미덕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또는 자식이 부모를, 곁의 이웃을, 누가 누구를 돕거나 도움을 받는 일 모두는 서로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일’이 된다.
가령 내가 저 아이를 마음에 두고 씨름하듯 챙기고 또 건사하는 일은, 다들 그것을 두고 고마워하지만 실은 내게 더 큰 유익인 것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는 그래서 서로의 것이지 일방적인 어느 한 쪽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이가 오다 안 오니까 서운한 건 내가 더 컸다. 어떤 보람에서부터 아이로부터 얻었던 유익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어제그제 혼자 있으면서 더욱 깊이 생각하였다. 누가 누굴 돕고, 또는 도움을 받고 하는 이 모든 일은 결코 일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행여 그것이 일방적일 때 선이 악보다 악할 수 있다. 의로움이 해로움보다 심한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수업 중에 아이엄마가 와서 다들 있는 앞에서 아이를 끌고 갔다. 무슨 일인지 그 영문을 알 수는 없으나 평소 사건을 보면 짐작이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엄마는 아이의 인격을 모독하는 짓을 범하였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상대적으로 아이는 헤프고 어설퍼서 모두에게서 왕따를 자처한다.
수업 중에 또 아이 둘이 서로 장난을 치다 둘 다 토라져 울음을 터뜨렸다. 분에 못 이겨 선생에게 욕을 하는 경우도 잦다. 그런 아이들의 뒤에는 지나친 엄마의 참견이 있거나 또는 방임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당위는 스스로의 수고를 퇴색시킨다. 반대로 묵인하고 방임하여 회피하는 무관심은 지독한 오해를 낳는다. 그런 아이들이 제멋대로 굴기 일쑤여서 약속을 어기는 일은 다반사고 분에 겨워 소동을 일삼는다. 아내는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나열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일상이 곧 우리의 ‘주의 사역지’였다.
안이함은 나태함에서 비롯되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방관은 우리의 경각심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창 38:1).” 저의 일대기는 아주 사소함에서 뒤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로 잡으시는 이는 항상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그릇됨을 가지고서 주의 일을 행하신다. 우린 다만 그 일에 참여하느냐, 방관자로 멀찍이 서서 외면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오늘 말씀은 그 모든 문제의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비록 내가 아내를 등 업고 살고 딸애의 봉양을 받으며 무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 같으나 그 또한 일이라.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사명은 저로 하여금 부자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돕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었다.나사로는 묵묵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들고 거지의 사명을 다했을 뿐이다. 부자의 관여를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몫일뿐이었다.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이다. 그것이 돕는 위치에서이든 도움을 받는 위치에서이든 우리의 사역은 결국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창 38:14).” 다말의 실행은 과감하였고 모든 상식을 깨는 일이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6).” 유다는 승복하였다. 결국 우리의 일은 목적도 과정도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일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오늘이 그 자체로 귀한 것은 내가 또한 주의 이름을 가까이함이다.
나머지 모든 일은 주가 이루신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6-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0) | 2018.12.22 |
---|---|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0) | 2018.12.21 |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0) | 2018.12.19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18.12.18 |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0) | 2018.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