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세기 39:23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시편 76:5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건 사실이나 그렇게까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할 뻔했고, 애굽으로 팔려가 노예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저는 주를 경외함이 드러났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의 눈에도 보이는 것을 그의 피붙이들은 어찌 알지 못했을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는데도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저의 성실함이나 강직함의 결실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어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묵상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오로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는 그 중심에 있는 게 아닐까? 물론 힘에 겨워 두려워도 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그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아니었다. 하여 구하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야 사람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누군들 괴로움을 족하게 여길까?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상기하며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신 것이다.
요셉이 그 지경의 현실에서 그럼에게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저는 여호와를 경외하였다. 이를 팔려간 집의 주인인 보디발도 알았고, 끌려간 감옥의 간수장도 알았다. 그리 여겨지고 보이는 일이지 감추일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이는 우리로 빛이라 하심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
내가 빛나는 게 아니라 나로 빛나게 하시는 이의 영광을 우리는 감출 수 없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 단지 믿는 사람끼리, 같은 교회 교인들끼리 아는 친절과 예절이 아니었다. 하도 건성으로 굴어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글방에 왜 오냐? 그러자 녀석들은 글 배우러요! 한다. 글 배운다는 게 무엇이냐? 하고 다시 묻자 갑자기 갸우뚱한다. 글을 몰라서? 글씨를 쓸 줄 몰라서? 글을 배운다는 건 그리 산다는 소리다. 나는 곁에 있는 한 아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지난주에도 화를 못 이겨 담임선생에게 욕을 한 아이다. 종종 글방에서도 저들끼리 장난하다 토라지면 물건을 던지고 찢고 자기 분에 못 이겨 울어버리는 아이다. 그런데도 우린 그 아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더 나아지고 말고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성과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이는 은연중에 ‘글을 배운다.’ 자신이 쓴 글이 자기 생활을 다스리게 한다. 읽은 잠언의 말씀이 생각난다. 여전히 다를 바 없는 것 같으나 나도, 곁의 아이들도 그 애가 그래도 변한 것을 느낀다.
하물며 ‘글 배운다.’는 의미가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으로 오래 되씹으며 여유로운 훈련이 필요하다. 누가 말하길, 이 일만 끝나면 그땐 성경도 보고 못했던 기도도 하고 좀 여유 있게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 누군 은퇴 후에 나처럼(?) 자신도 조그만 사무실을 내어 좋아하는 책을 모아가며 여유롭게 지낼 것이라 꿈을 꾼다. 배우고 익힌다는 건 그처럼 나중에, 다음에, 더 나은 여건이 되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랬던 녀석이 이젠 군것질거릴 사서 먹으면 날 주려고 무언가 따로 챙겨온다. 어제는 뜬금없이 장미꽃 모양의 젤리와 자신이 직접 붙여 만들었다는 무슨 스티커를 날 위해 내게 주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 애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하는 짓은 여전하고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제멋대로 굴지만 그 안에서 뭔가 달라지는 걸, 곁의 아이들도 그 부모도 느낀다. 그래서 그 애 누나도 보내고 그 애 친구도 온다. 그 애는 여전한 것 같은데, 뭔가 다른 것이다. 주일 날 좀 나와! 하고 말했더니, 귀찮아요! 하고 퉁명스럽게 받는 아이인데 밉지가 않다. 신기한 건 이 마음이다.
고작 붙들려온 노예인데 보디발은 요셉에게 매료되었다. 주인의 여자를 간통하려다 감옥에 끌려온 히브리 노예 소년일 뿐인데 간수장은 저에게 매료되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알지만 우리는 여전히 말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안타까움은 고스란히 주께 아뢰는 밑거름이 될 뿐이다. 기어이 전날에 아이를 아이들 앞에서 끌고 간 엄마는 아이를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힘든 아이였다. 그만뒀으면 했던 아이고, 그래서 전에 같으면 속이 다 후련하여 잘 됐다싶었을 텐데, 아내는 마음이 어려웠다.
애 엄마가 우는 거야. 자기 딸이 학교에서 선생이나 아이들한테 무시당하는 걸 알거든! 처음엔 그 애 엄마 말씨에 불쾌했는데 그게 그 사람 말투야. 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속상한 걸 말하다 말고 엉엉 우는데 난처하더라고! 아내는 안쓰러움으로 아이와 아이엄마를 말해주었다. 모처럼 교회에 올라와 둘이 저녁예배를 드리기 전이었다. 상대적으로 아이는 태평하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는 그런 일련의 사건이 있었고, 엄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세상에 아무렇지 않을 영혼은 없다!
아이가 그만두기 무섭게 누가 새로 온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그 애 또한 착하고 내성적인데 성적이 바닥이고 고집이 세다. 그래서 말썽이 되곤 하는 모양인데. 하나님이 그리 우리에게 두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을 이제 우리는 잘 안다. 당장은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로 안 믿는 자리에 서있지만,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다.’ 우린 그렇듯 이해하고 받아들여 묵묵함으로 견디기를 서로 격려하였다. 탁월한 숨쉬기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탁월한 주의 일이란 없다.
요셉은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모두 주의 영광으로 바꾸는 전형적인 주의 사람이었다. 어떠하든, 어떻게 됐든,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기도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뿌리를 내려야 그 가지가 자란다는 원리를 일깨우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우린 다만 주가 뿌리신 한 알의 씨앗으로 족한 것이다.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전에 죽어져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 그런데 이 일도 씨앗이 하는 게 아니라 흙이 한다. 내가 상상했던 기대와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일쑤다. 애가 좀 달라졌으니 이제 이럴 것이다, 하고 기대하고 있으면 어림도 없다. 아이엄마가 같이 우리와 주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나 하고 기대하면 감감무소식이다. 또 무너지고 실망하고 좌절하기를 수십 번.
흙은 겨울 동안에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수십 번. 그 틈새로 볕이 들고 물이 고여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숱하게 반복하면서 흙은 헐거워지고, 그러는 동안 문드러진 씨앗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뿌리를 내려 먼저 땅 속을 부여잡는다. 어디서 읽은 내용으로 말하면 그래서 새순이 단단한 흙을 밀어 올리며 밖으로 나오는 힘이 몇 톤을 거뜬히 들어 올릴 정도라고 하니! 실제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한 방송 프로에서 버섯이 버려진 아스팔트를 밀어 올리고 그 위에 놓였던 공사장 컨테이너 부스를 비스듬히 들어 올린 일이 있었다.
땅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봉긋하니 부풀어 오르자 그 밑에 매설된 송유관이 있나, 가스관이 있나, 그것들이 터졌나 호들갑을 떨다가 조심스레 땅을 파헤쳤을 때였다. 그 땅 속에서 버섯이 머리를 디밀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더라는 거였다. 이를 두고 전문가는 말하길, 이처럼 새순이 돋아나는 힘은 가히 경이로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곧 우리는 이제 저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그 엄마의 완고함이 얼마나 불가능할 정도로 완고한지, 더는 그런 데 마음 쓰지 않는다. 아이를 그만 보내겠다고 통보하는 엄마가 서럽게 펑펑 울더라는 말에, 나는 다음 말을 굳이 할 게 없었다.
우리는 다만 뿌려지는 씨앗이다. 이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한 알의 밀이 그 증거로 자라났다. 도대체 내가 저런 애를 왜 예뻐라 할까? 아내는 왜 그 모질고 지질한 모녀의 이야기를 며칠째 거듭하면서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그 원리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하여, 더디고 오랜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곧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해지면 가난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보물이 있었으니.
혼자 있는 시간에 이처럼 말씀을 따라 찾아가며 그 길을 걷는 여유로움이 값진 것이다. 전에 읽었던 책을, 그 작가를 여전히 사랑하며 저가 붙들고 마주하였던 하나님을 같이 동행하며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게 보물이었다. 일이 많고 하는 일이 잘 돼, 여전히 다음으로 미루고 있는 누구의 성공은 그래서 위태로울 따름이다. 홀연히 더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새삼 말씀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혼자 할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을 즐길 수는 없다. 이는 훈련에 따른 결실이지 어쩌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지 못한 노인들이 공원으로 모이고 콜라텍을 전전긍긍하고 유튜브를 뒤지며 당장에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뭔가를 기웃거려대는 것이다. 인생 노년의 여가 시간이 고역이라. 그러니 무료함보다 귀한 묵상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저 아이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할까? 이번 한 주 내내 되뇌곤 하던 생각이었다. 누굴 책임진다는 게 우습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끝났으니 끝내야 하는지, 여전히 이어가야 하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그냥 더는 나 몰라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아이는 그만두고 아이엄마는 몰지각하게 굴어 정나미가 떨어져도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는 여전히 기도하게 하시는 순간까지이다. 어제 아내와 그리 이야기하였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더는 말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래서 또 주님이 새로운 아이를 붙이시고 그 아이에게 마음을 쓰게 되면서 더는 생각도 마음도 무뎌지기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지 않겠나? 부디 저 어린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 엄마의 고집불통 완고한 마음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곧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시 76:5).” 결국 우리가 의지하고 바랄 것은,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 주를 경외함이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요셉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리 걸어가신 것처럼,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만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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