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기 20:20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십계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라고 누가 설교하였다. 그런 기사를 읽다보면 먼저 두려움이 든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텐데, 복음은 침묵이다. 우리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저는 누구신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이를 기억하고 아는 자가 복되다. 그런 거 보면 복음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다.
성숙을 위한 로드맵이 십계명의 경로가 아닐까?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것. 숱하게 끼어들고 다시 재생되는 내 안의 여러 신들을 마주할 때면 여실히 느껴진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신이 내 자신이 아닐까? 자기 자아를 신으로 두고 이에 감정이 이끌리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니 늘 그 속에 볶여 살 수가 없을 때 주어지는 처방전이 제 일 계명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
결국 ‘그 신들’은 나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부쩍 피규어(Figure) 인기가 대단하다. 엄청난 산업을 이뤄 생산 가치를 부추기며 성장하는 사람이나 동물 모형의 장난감이다. 성장을 멈춘 시대가 아닐까? 한데 이게 모든 세대마다 때론 신주단지로, 그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정령으로, 푯대로, 솟대로, 당산나무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우리를 위하여 만든 우상’으로서 요즘은 난다 긴다 하는 아이돌 인기 연예인들에 이르기까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4-6).” 이와 같은 이정표를 어느 목사라는 이가 이 시대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면 대체 저는 누구를 위한 사역자인지. 결국 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사람이 아니겠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7).” 이에 따른 가장 기초적인 실천이 주일성수일 텐데, 그걸 또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분해하여 희석시키기 일쑤이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8).”
그래서 성경은 자라가야 한다고 하셨구나!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막연하여 그 성장의 범위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래야 굳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얼마나 자주 흔들리고는 하는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빈번하게 쓸려 다니고는 하는지. 온갖 교훈과 풍조가 넘쳐나는 시절에 우리의 중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 없으면 기준이 없고 기준이 모호하면 주먹구구식이 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하였구나.
그리하여 말씀은 우리로 지혜를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이는 그 예정하신 뜻대로 하심이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1).” 오늘 내가 이처럼 주 앞에 서게 하시려고, 나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오늘의 나는 주의 작품이다.
이를 아는 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비록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세월이 흘러가는 것 같다 해도. 아이는 여전하고 그 주변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것 같다 해도. 오직 우리의 능력은 사랑과 절제였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게 결코 막연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가장 빈번한 싸움은 내 안의 우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정도가 사뭇 달랐다. 무엇을 추구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바라는 실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멀리서 한 달에 한 번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오시는 늙으신 아버지의 발길이 고맙고 귀하였다.
오기로 한 누가 나왔으면 싶었는데, 나는 우리끼리 드릴 때와 달리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가 함께, 그래서 성장하는 수밖에. 누구 마음을 돌리킬 수 없고, 한 뼘이라도 저의 열심을 자라게 할 수도 없으며, 저로 입을 열어 주를 믿음으로 고백하게 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러는 동안 성장하는 것이다. 내 안에 두시는 애달픔과 안타까움이 나를 독려하여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이제는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떠내려가지 않게 하시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빌라도’가 있는지 새삼 혐오스럽기까지 하였다. 진리가 무엇이냐?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고 살지만 그 허망함에 대하여 어찌 말로다 설명해줄 수 있을까?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들 돌아가고 나는 조금만 더 성숙하였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연연하는 것으로부터 놓여나고 그리하여 보다 의연하게 주만 바람으로 살 수 있었으면! 말로 할 수 없고 어떻게 드러내어 증명할 수 없는 진리 앞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침묵뿐이지 않나, 요즘은 자꾸 그리 여겨진다. 말이 너무 많고 방도가 너무 넘쳐나며 저마다 옳다 여기는 이상과 현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잠잠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애끓는 마음이면 또 그 마음으로, 안타까움과 속상한 마음뿐이면 그 상태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모르겠다 나는, 살면 살수록 모르겠다. 누구의 열심이 부럽다가도 부질없어 보이고, 저의 수고와 애씀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는 자기만족에 겨운 게 아닐까싶을 때면. 것 또한 내가 나서서 뭐라 할 게 아니어서 더욱 또 잠잠히 주만 바라는 것이다.
무릇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이 잠잠히는 더욱 주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겠나.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니! 송구하면서도 가슴 벅찬 일이어서, 바라고 구할수록 더욱 더 잠잠히 주만 바라게 되는 게 복음이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우리에게 드신 이정표를 따라가는 길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르시는 십계명 자체가 우리의 올무가 아닌 자유였다(출 20:13-17). 이러할 때 모세는 진리 앞에서의 두 번째 자세를 일깨운다.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19).” 그 첫 번째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내 의지, 내 수고, 내 이상과 내 바람의 온갖 수단을 벗어내는 일.
이 둘은 마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일깨운다. ‘말씀하소서, 들으리이다.’ 할 때면 내 발에서 신을 벗게 돼 있다.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늘은 말씀이 들려주신다.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20).” 아차, 싶을 때 저만치 쓸려가기 일쑤인 세상에서. 나로 늘 표도 안 나는 이와 같은 자리에 두신 까닭은 무슨 성과를 위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였다. 묵묵히 침묵함으로 주의 음성을 듣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시편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명료하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결국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 내 안의 증거는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이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나의 비루한 날들 가운데서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그러기까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말씀 앞에 잠잠히 침묵할 따름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21, 31).” 이로써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42).” 그러면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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