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전봉석 2019. 1. 22. 07:09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2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편 108:1

 

 

앙갚음의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허튼 삶을 살지 말라 이르시는 소리다. 보면 그 상황에서 어떠한가, 하는 게 저의 됨됨이다. 평소에 고상하고 온화한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좋을 때 좋은 사이는 좋을 때면 좋다. 싫고 궂은일을 당했을 때 과연 어떠한가, 하는 게 저의 본 모습이다. 신앙의 정도도 이에 가름한다. 우리의 영적인 수준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삶에서 오지 않는다. 이를 말씀은 엄히 가르치신다.

 

무엇도 감출 수 없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떤가? ‘양을 탈을 쓴 늑대’ 같은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후원금을 받아 모 선교단체를 운영하며 중국동포를 돕고 어린아이들의 생활을 지원하던 이가 수십 년간 성폭력을 일삼았고 가짜 목사 행세를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혀를 끌끌 차며 다들 저를 욕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런 괴물이 없을까?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18).” 무엇을 담고 사는지, 성경은 묻는다. 듣는 게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힘이며, 이 힘은 지식에서 나와 기준을 이루고 푯대를 향하는 원동력이 된다. ‘스스로 삼가라.’ 매우 의지적인 처사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나름의 선한 의도가 실은 자신의 본능을 자극한다. 우쭐하여 돋보이고 싶고 남들의 시선은 과장된 몸짓과 언변을 구사하게 하며, 그래서 마냥 선한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사는 신자가 허다하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교회를 다닌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나름 성도로 교인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하다면 이는 빤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6:1-2).” 이를 아무리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고 보여주어도 보려 하지 않는 처지에 놓였으니, 오늘 아침 본문은 그 값을 무는 인생에 대한 언급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 이를 마치 자기감정에 따른 보복의 근거로 삼는 이들이 많은데, 오히려 자신이 당할 징계의 목소리로 들릴 때 복이다. 곧 내 안에 이는 잦은 감정의 욱, 하는 심정이 모두 두렵다. 실은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서러움과 짜증과 원망이 내 안에 득실거린다. 아마 이를 다 표현하고 살면 나보다 바닥인 사람도 없겠다.

 

날마다 싸움이라. 성령이 아니시면 나는 나 하나도 건사할 수 없다. 누가 누굴 탓하고 판단하고 혀를 끌끌 찬단 말인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대체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으로 살면서도 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속내를 어쩌면 좋을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 그래서 난 말씀이 필요하다. 말씀밖에 다른 묘수가 없다.

 

어떤 미움과 서운함이 일다가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주가 나를 위해 구하심으로 다시 또 말씀 앞에 승복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20).” 말이다. 아니면 나는 수시로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한다.

 

모처럼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통화를 하며 요즘은 어떤가, 저의 건강과 생활을 살폈다. 여전하여서 저는 참 겁이 없다. 뱃속에 무슨 혹이 있다는데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산다. 허리 디스크가 터졌는데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끙끙거리며 견딜 뿐이다. 그처럼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들어갈 대학이 없어 빌빌거리는데도 방관만하고, 이제 고2가 되는 둘째는 더 나른한 태도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태평하다. 어쩌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기도를 잃어버린 것일까?

 

널 위해 기도할게, 하면 풋, 하고 웃는다. 그럴 때 보면 내 안에 가장 큰 증거는 ‘어떤 상황’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귀하였다. 우리는 드러날 것이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문제 앞에 모두는 속수무책이라. 평소 갈고 닦는 기도와 신앙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내 앞에 피할 수 없는 유혹이 왔을 때, 가령 보디발의 아내가 모든 걸 걸고 나를 유혹할 때 우린 과연 이를 마다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가졌는지!

 

미국의 어느 남자 배우는 베드신을 찍지 않기로 유명하다. 저는 자신의 직업이 배우이지만 연기라는 미명 아래 주 앞에서 부끄러운 것을 예술이랍시고 허용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찍혀 더는 배역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주변의 믿는 자들은 물론 안 믿는 자들까지도 저를 ‘그런 사람’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음란한 연기에서 저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회사에서 관행으로 일삼는 ‘눈먼 돈’을 과감히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사회생활에서 마다할 수 없는 음주 문화나 접대 문화를 마다할 수 있는 용기. 그 됨됨이가 쌓이고 싸여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킨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성은 뿌리가 나고 굳어져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 그런데 안다고 하면서도, 교사로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를 중심으로 살면서도 안 믿는 이들과 어울리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고 혼인신고도 않고 동거하는 삶에 거리낌이 없다면!

 

안다고 아는 그 앎이 실은 모르는 것이거나 거짓이거나. 그러다 어떤 상황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불신앙적인 태도에서 스스로도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위로를 구하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 말 저 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벌이면서 동조를 구하고. 그러는 동안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설 시간이 없다고 하니. 그런 친구가 또 내 곁에 있어 나는 저를 보고 나를 본다. ‘자신을 세우라.’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

 

우리가 취할 마땅한 자세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 그러기가 근데 어디 쉬운가? 말로야 누군들 못하고 저마다 뭔들 확신하지 않겠나? 정작 어떤 상황, 무슨 문제서 보면 비로소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보다는 비관을, 주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원망과 서러움을, 자신을 주 앞에 부복하기보다 남과 비교하며 신세 한탄을.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를 맛으로 보고 경험으로 참여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나는 결코 아닐 것이라 장담할 수 없어서 두렵다.

 

실제로 그러했던 나를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에 이처럼 주를 바라게 하신 것이니. 나는 언제든 주저앉고 쓰러져 낙심하며 원망할 위인인 것을 잘 안다. 얄팍하고 가소롭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는 어떤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의 헌신과 봉사를 운운하며 누구 앞에 내세울 위인이 못 된다. 이를 두고 아내는 내게 언제 철드나, 하고 염려한다. 그럼 나는 나의 그런 것이 정직하기 때문이라고 포장한다. 이 또한 가소롭다.

 

‘나의 의는 어떠하든 더러운 옷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토를 달지 못한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나는 결코 선하지 못하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와 같은 고백 앞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 누구보다 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여전히 어떤 증표를 바라고 예표를 구한다. 이미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은총 아래 살면서 말이다.

 

그러니 뭐가 조금만 어떠면 임의로 판단하고 누구를 정죄하기 일쑤다.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 나는 옳은데 남들은 다 틀렸다. 그런 식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오늘 주시는 말씀이 내게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좋을까? 시편은 그 방도를 제시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 108:1).”

 

내 안에 숱하게 이는 감정과 감정의 골을 나는 메울 수 없다. 어떤 서러움과 원망을, 누구에 대한 판단과 저를 비난하는 마음을, 남 탓을 하고 나를 두둔하려고 드는 거짓된 변명을, 무엇보다 간사스러운 나의 위선과 겉으로만 온전한 모양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나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게는 주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런 나를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찬양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