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벗어났도다

전봉석 2019. 2. 9. 07: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출애굽기 39:42-43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시편 124:7

 

 

 

먼저는 말씀이고 다음이 순종이다. 순종은 정확하고 성실한 이행이며 다음은 축복이다.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을 주의 명령대로 잘 만들었는지, 그것을 감수하고 축복하는 대목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

 

만유의 하나님이시지만 모두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우리 영혼을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시편의 말씀에 나는 찬송한다. 더는 연연하여 친구를 찾고 사람을 살피며 세상을 좇지 않아도 되는 일이어서 그 올무가 어떤 건지 조금은 안다. 아이가 혼자 노래방에 갔다. 그냥 그렇다는데 꼭 그래야 하나싶어서 마음이 짠했다. 유독 친구를 그리워하는데 알고 보니 엄마의 사랑을 희구하는 것이었고, 별거 아닌 별거로 두 사람이 갈라진 상태였으니.

 

연연해하지 말란다고 그리할 수 있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갈까? 하고 아이에게 물었더니 아이가 싱겁게 웃었다. 이 모든 게 올무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엉기고 얽혀 뒤죽박죽이 되기 십상이라, 그러느니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구는 쪽으로 아이는 이제 혼자가 편하다며 씁쓸하게 돌아섰다. 이제 고1, 아직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어쩌나. 안쓰러운데 안쓰러워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종일 설교 원고를 작성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간히 아이 생각이 났다. 늘 혼자 있는 시간이면서 새삼 혼자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언제부턴가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다 털어내게 된다. 그럼 온통 성경구절만 남는다. 이를 연결하여 들려주기만 하면 될 일이다. 구구절절 말을 덧댈 필요가 없다. 정치를 운운하고 사회를 들춰봐야 소용없다. 그런 사람은 예전에도 있었고 그런 일은 늘 벌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신문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고 뉴스방송을 중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듯 군더더기를 걷어내면 말씀과 나만 남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옳고 귀한 말씀이면 또 무슨 소용인가. 그것이 나를 먼저 붙드셔야 하는 것이었으니, 나의 ‘에봇’은 성경의 권위였다. 하나님은 일러 말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스스로 있는 자가 모두의 주인이시지만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6).” 결코 보편적인 존재로 머물지 않으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이름 뒤에 붙는 소유격 조사 ‘의’는 지극히 개별적이며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곧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그러므로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오늘 우리에게 두시고 맡기신 일이 아니겠나?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대하 20:8).”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9).” 나는 말씀 앞에서 안위한다. 세상 사는 날 동안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옭아매지만 주께 부르짖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 나를 구원하신다. 지극히 개별적인 하나님과 나의 비밀한 이야기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 그것으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를 내가 알든 모르든 그리하여 오셨고,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하물며 내가 그릇된 길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노래’ 때문이고 요즘 즐겨하는 ‘그런 놀이’ 때문에 외면하고 주저하고 멀리하는 지금 심정은 알겠는데. 어쩌면 가장 안타까운 게 ‘왕따’인 걸 못 견뎌하는 일이었다. 안 그러려고 더더욱 친구들에게 다가가보고 가족들을 필요로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어서. ‘혼코(혼자 코인노래방)’ 간다는 말에 마음이 저렸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하는 이 말씀의 위로를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었다. 어느 정도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나야말로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친구들을 구걸했던가? 사랑을 갈망했던가? 관심을 얻기 위해 뭐라도 내줘야 하고, 그래서 ‘너 가져’ 하던 말 속에 담겼던 나의 걸신들린 마음을 증오한다.

 

이는 이 땅의 특징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여전히 그러한 우리의 본질 가운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해야 한다(창 1:2). 곧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내가 따로 구별됨이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두루 행하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알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시는. 우리는 자꾸 문제의 원인을 찾아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만 말씀은 이미 확연한 사실 앞에 우리를 마주하게 하시고 그 앞에 세우신다. 자꾸 허튼 데 맘 쓰지 말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신다. 혹시나 해서 기웃거리는 세상이 지겹다. 그 사람들이 신물 난다. 넌덜머리가 나는 친구와 선생과 어느 모임과 그 안에서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는 허기와 주목 받고 싶어 하던 어떤 간절함의 구역질나던 모욕감에 대하여, 나는 아이들 곁에서 자꾸 그런 모습이 보여 속상하다. 안 그래도 돼! 하고 말해준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건 안 돼! 하고 단호하게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가령 우리 중2 여자아이는 아빠에 대한 환멸로 남자어른을 경계한다. 증오에 가깝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꾸 남자에게 끌린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남자한테 말이다. 아니에요, 그런 거! 하고 강한 부정을 하지만 입 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연신 문자를 확인하고 싱거운 소리로 말 걸고 하는, 나는 아이가 위태로운데 어떻게 뭐라 해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묘한 게 참 사람 심리다. 외도하여 이혼한 아빠를 보고 증오하였던 딸애가 자라서 외도를 한다.

 

유독 남자를 찾던 내 친구 누구를 생각하면, 오늘 아이의 저런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자기감정의 반동에 의한 끌림이 아니겠나싶다. 끌림과 홀림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시작한 운동을 그만두게 하고 싶은데, 그래서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도 마음이 자꾸 그리로 이끌리는 것이어서. 아, 이 지긋지긋한 죄의 속성을 어쩌면 좋을까?

 

나로 그리 돌아오게 하시고 여전히 어떤 마음은 내 영혼을 휘둘러 멱살 잡힌 것 같을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오늘 우리 곁에 두시는 ‘저 아이’를 이해하고 돕게 하시려는 거였구나! 의외로 너무 많은, 상한 심령을 곁에 두시는데 그러고 보니 다들 청소년들이라. 그 나이 때 내가 어울려 씨름하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것이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감히 말할 수 없겠으나, 조금은 알겠다. 나의 약점이 저들을 마주대하는 강점이 되어준다. 그게 비록 같이 씁쓸해하고 때론 내가 더 지쳐 먼저 울곤 하지만.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돼! 너무 애쓰지 마! 하고 말해 줘야 하고 곁을 같이 해야 하는 일이어서. ‘혼코’를 가고, 또는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도 실은 운동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른남자에게 이끌리는 마음이었으니.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수렁이다. 되레 더 빠져들어 사경을 헤매면서도 그게 좋은 것이다. 얼굴이 상기되고 들뜬 마음을 숨길 길이 없다. 좋으냐? 물으면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혼자서 거울을 본다.

 

나서서 그 사범인지 코치한테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속만 끓이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다. 주님, 하고 애끓는 심정으로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고작 그 일을 그처럼 귀히 여기실 줄이야. 기도할 줄 모르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이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반드시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의 분명한 사랑을 확신한다. 아무도 모르게 또는 은밀하게, 나를 여기에 혼자 두시는 이유였다.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시 124:6).” 결코 우리를 그리 두지 않으실 것을,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2-5).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7).” 결국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