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위기 1:4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편 126:2
웃음과 눈물에 대하여는 묵상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짙어지는 것 같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찬양은 그럴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희다. 우와, 하는 경탄과 같은 것이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함이고, 지식은 그 하나님을 아는 영생이며, 희락은 곧 하나님의 웃음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될 일을 두고,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데도 믿겨져서 믿고 있는 자의 웃음이 희락이다. 영생을 알기 때문이고 그래서 주를 경외한다.
이것도 세상에 두고 견주려할 때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겠으나,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이를 바꾸어 하나님의 참 웃음으로 바꾸어놓으시는 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그저 나는 맡기신 날에 맡기시는 일에 충성할 뿐이다. 아이가 남아 같이 성경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마침 누가 메모를 같이 할 수 있는 성경을 주었는데 아이에게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읽고 묵상하고 나누고 메모하면서 한 번에 한 장씩 할 수 있는 정도로 하자. 그리 이르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네, 하고 대답할 때의 웃음 같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말씀 앞에 가만히 앉게 하실 따름이다. 내가 나서서 뭘 어떻게 주도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을 주시고 그리 행하게 하실 때 노아도 아브라함도 사라나 모세도 바울도, 그 어떤 믿음의 사람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잘만 살고, 잘들 성취하며 이루고 사는 세상에서 뜬금없이 ‘구원의 방주’를 지으라니! 이제 노년의 때에 노후 준비를 하고 늘그막에 은퇴를 즐기고 있을 때에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니! 그리고 아흔한 살이 되어 여인으로서 기력을 다한 뒤인데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 왕자의 신분에서 졸지에 도망자로, 추적자의 신분에서 졸지에 동역자로.
그러고 보니 히브리서 11장에 망라된 믿음의 사람들 어느 하나도 뭔가 뚜렷하고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준비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그리 행하는 믿음을 두고 세상에서는 ‘이것도 바람을 잡는 일처럼 헛되도다.’ 할 수 있겠다. 내 마음에 주시는 뜬금없는 제의, 우리 주일 날 끝나고 성경공부하고 가자! 할 때에 아이가 순순히 네, 하고 순종할 줄이야. 이제 다시 복학을 할 것이고 복수전공을 하게 되면 더욱 시간이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때가 되고 그리 필요하니까 그처럼 무난하게 일이 되게 하심을 알 수 있다. 내가 무리해서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럴만한 능력도 자질도 안 되지만,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하필 집 근처에 큰 교회가 있고 저들의 찬양과 기도소리에 부모의 심기가 불편한데, 아이는 주일 날 아침 혼자 일어나 준비를 하고 군포에서 인천까지 예배에 온 것이다.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하였다. 안 믿는 가정에서 혼자 맨땅에 머리 박듯이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사정을 나는 잘 모른다. 돌아보면 나는 늘 특혜였으니 부모의 사역이 은연중에 나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셨고 앞서 이끄셨다. 오히려 가기 싫은데도 가야 하는 분에 겨웠던 은총은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미안할 정도이다. 을씨년스런 겨울 날씨에 다들 곤하게 잠든 시각에 혼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교회로 출발하였을 아이에게 주의 은혜가 더욱 함께 하시길.
덕분에 아이는 형이 같이 예배에 나오면서 은근히 활력을 얻었다. 자리를 고쳐 앉아 형 옆에 앉았고 말은 안 하지만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장 일이 너무 빠듯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생각 같으면 일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두었으면 싶은데. 늘 더는 내가 어떻게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내 일이다. 이 아이는 토요일에 저 아이는 주일 오후에 각각 성경을 같이 읽고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감사하였고 신기하였다. 그리 되어 그리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다. 내가 선택하고 계획하고 이루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나 또한 날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일이라. 장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나.
이 아이가 그렇게 믿음의 뿌리를 내릴지 또는 언제고 떠날지, 저 아이가 언제쯤 나을지 또는 여전하거나 더욱 심하여져 그냥 그저 그리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준행하는 게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 같지도 않은 말씀을 받고도 묵묵히 그리 행하였던 게 공통점이다. 즉 오늘 우리가 아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나름의 통계와 구도를 가지고 솔루션을 이행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되레 무능할 정도로 무모하고 막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사 30:21-22).” 말씀이 인도하실 것이다. 이르시는 대로 그저 묵묵할 따름이다. 아이가 싫어요, 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네, 했음으로 다음 보폭을 뗄 차례다.
인생은 결코 인생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전도서의 진리 앞에서 나는 오히려 안도한다. 내가 누리려 하고 즐거워하려 보람을 찾는 그 모든 게 헛될 뿐이라는 게 왜 더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나에게는 언제부턴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하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되레 넌 할 수 있어! 하는 말씀이었다면 더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은 모두 헛되다는 데서 안도하는 까닭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데 확신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라의 웃음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나름은 참고 기다려도 봤고, 다른 궁리 중 하나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대신 아들로 얻어도 보았으나, 그 수고가 모두 헛되었을 뿐이라는 데서 아흔한 살이 되어 더는 그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고 여기던 때에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니! 비로소 더는 내 책임이 아닌 것으로 웃음밖에는 남은 게 없는 것이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그러게,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같이 웃게 되는 것은 왜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혼자 속 끓이며 애태워 이 녀석도 군대 제대하면 뻐꾸기 둥지를 날아가듯 더는 종잡을 수 없는 일이겠다, 여겨질 때의 다시 시작이라니! 아이가 순순히 네, 하고 답할 때의 내 안의 어떤 기쁨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아내와 딸애가 자리를 피해주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가망이 없다 싶을 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준행하기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시는 하루였다. 나는 다만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의심을 하든, 그저 어이없이 풋, 하고 웃든. 설마, 하고 무모하게 첫 발을 떼든. 그처럼 그리하게 하시는 이가 ‘이 터’가 되시는 거였다. 내가 세우고 내가 이루어가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따로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할까하다 그냥 읽고 듣자, 묻고 답하자 그리 정하였다. 마침 메모가 가능한 성경책도 아이에게 줄 수 있었다. 종종 나는 이 모든 되어지는 일이 오묘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주셨다. ‘지혜와 지식과 희락’으로 우리가 주의 길 가는 동안,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신다.’ 이 놀라운 진리를 살면서 삶 가운데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귀하였다.
나 또한 누구보다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어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로 삼으신 것일까? 우리 안에 두시는 믿음이 그 기적이라. 믿지 않는 부모와 형제가 오히려 설득력 있고 타당하고 합리적인데, 그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믿음이 그처럼 믿음으로 믿겨지니 그것으로 누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이른 아침 이와 같은 말씀이 내 삶으로 실감나게 하시니 이 또한 기적이라. 서로가 주시는 환경이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형편과 성별과 처한 모든 상황이 다른데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우리가 하나로 알고 누리고 체험하는 믿음의 삶은 같은 것이었다. 나의 웃음이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의 웃음이 되게 하시려고 사라의 웃음이 내 것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노아의 웃음과도 닮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면서도 또 그렇게 준행하고 주신 삶을 값지게 사는 일이었으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우리로 주와 같이 되게 하시려고. 믿음도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온전히 나아가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우리가 포로 되었던 때를 생각하고 우리로 꿈꿀 권리를 회복시키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 그래서 오늘 흘리는 눈물이 단지 고난으로 일그러져 서러움과 원통함의 눈물이 아니라 소망 중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 기꺼이 또는 마땅히 여겨 그리 준행하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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