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전봉석 2019. 2. 25. 07:10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레위기 15:31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 140:13

 

 

주의 성막을 더럽히고 부정한 중에 죽지 않도록하시려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어떤 어려움 또는 고초를 겪음으로 우리가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는 이치와 같다. 누군 완고하여지지만 우리는 비로소 주께 더욱 간절하여진다.

 

이와 같은 체험이 간증이 되지만 간증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10:19).” 말이 말을 낳고 말이 말을 이어 말 속에 말이 생성되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때론 입을 다물고 온전히 주만 바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은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5:3).”

 

이것이 헛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7).” 오후께 동기 목사 내외가 전화를 하였다. 7년 가까이 부교역자로 있던 곳을 사임하고 미얀마 선교사로 나갈까 한다며 이런저런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저들에게 주신 재능이 다양하니까 어딜 가든 그 쓰임이 좋겠다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구구절절 변명처럼 이어진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니 다소 낭만을 꿈꾸는가싶기도 하였다. 서른 중반의 나이였다. 뭘 해도 무난할 것 같았다. 카페를 하며 주일을 지키는 친구 목사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전화상으로 그렇게 말을 들어서야 어디 이해가 가나? 다만 주의 인도하심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난하더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원하는 사역이 아니라 주가 바라시는 사역은 그럴 거였다.

 

평소 우리의 일상이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 베드로는 베드로로 요한은 요한으로 그 쓰임에 합당하였다. 베드로를 바울로 바울을 베드로로 부르시지는 않는다. 우린 모두 각각의 기질과 성품으로 예수를 닮는다. 누가 무얼 하는데, 누군 어떤데 하는 식의 비교나 따름이 별로 바람직해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란 거냐? 할 때 나는 그 시간에 옴짝달싹 못하게 생긴 그때가 말씀 붙들고 씨름할 때라 생각하였다.

 

모르겠다, 나는. 요즘은 선교라는 이름이 마치 종교여행처럼 여겨지는 시대라. 누가 또 2주 동안 유럽을 다녀온다고 했다. 그럼 그냥 그런가보다 할 텐데 꼭 거기에 선교여행이란 표제를 다니까 그게 왠지. 왜 뜬금없이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는지, 묻지 않았다. 자신이 꽂혔고 그래서 신랑 목사에게 강권하였고 다음 달부터 세 달 어디서 훈련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그저 그런가보다 듣기만 하였다. 말이 선교훈련이지 비싼 과외비를 내고 속성으로 어떤 절차를 통해 추천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 또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일지도. 뜬금없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는가싶기도 하고.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할 소리는 아닌 것이고. 그저 나는 우리에게 맡기시는 아이 한둘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고작이라. 두 녀석의 전과 다른 모습에 놀라울 뿐이었다. 제대하고 온 녀석은 평소에 언어장애가 있다고 놀릴 정도로 말을 않던 녀석인데, 형형거리며 먼저 다가가는 한 살 아래 아이에게는 어쩜 그렇게 그때마다 살갑게 답을 하는지!

 

또 아이는 이제 세 번째 보는 형인데도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뭐라 말을 자꾸 건다. 나는 저 둘을 보면서 모르는 척 하지만 우리의 끌림은 분명히 영적인 일이라.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내가 이어주고 설명하여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즈음에 아버지의 설교는 우리에게 적절하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저 막연한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실제의 것이었다.

 

먼저는 다만 말씀을 따랐을 뿐이다. 그땐 믿음이 없었다. 이에 말씀을 좇아갔을 뿐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2:4).” 그것이 곧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결과를 낳았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이것을 바울은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이는 약속을 붙든 결과이고 이 언약을 근거로 하는 믿음이었다. 곧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약속의 종교다. 이에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다. 저는 엄연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였다. 말씀이 계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4:18).”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저들이 어찌 뜬금없이 미얀마 선교를 그리 준비하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우리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1:17).” 그럴 수 있는 게 어찌 이성으로 설명이 되겠으며 상식으로 이해가 되겠나. 다만 그간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누구보다 그 하나님을 잘 안다. 체험하였다. 간증이 있다. 그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디딤발을 굳세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 곁에 앉아 말씀을 듣고 메모하면서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사뭇 진지하고 의젓하여서 감사하였다. 늘 아뢰는 기도 중에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과 소망이 우리를 붙들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그 결말은 천국이 저의 품이라.

 

곧 우리의 천국이 우리 품에 있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16:22).” 새삼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마음이 설렜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에 두신 것이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품에 천국을 두심이다. 죽음 너머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결코 홀로 심판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건 아벨을 먼저 받으셨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의 소행이 구원의 당락을 좌우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몸을 드린다는 것은 생각이나 어떤 이상과 꿈을 이르는 게 아니라 실상의 삶이다. 생활이다. 일상이 곧 영적예배이다. 아이가 아이의 말에 대꾸를 하고 주의 마음으로 격려하는 일도, 함께 하며 서로 위하고 돌보는 마음은 모두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이것으로 또 오늘 하루를 새로 허락하신다. 분별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삶으로. 결국 우리로,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15:31).”

 

우리 개개의 개인적인 사역이면서 동시에 우리 곁에 두시는 이를 향한 주께서 맡기시는 일이었다. 하여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40:13).” 우리의 정직은 온전히 주를 의뢰함이다.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다. 믿어지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현실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염려하는 게 아니라 오늘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전능자 하나님이신 것을. 에녹의 동행과 노아의 순종은 앞으로의 심판을 들었기 때문이다.

 

들음에서 믿음도 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먼저 받으신 우리 곧 자신이었다. 그런 우리로 부정을 떠나 주의 성막을 더럽히지 않게 하시려고!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1).”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4).”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