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레위기 14:57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살면서 이런 저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으나, “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와 같아서 “곧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우리를 부정하게 한다(레 14:54-56). 오늘 본문은 이러한 때에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57).”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더욱 주께 감사함을 배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이를 알게 하시려고,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알리신다.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9:17).”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값지다. 전에는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던 것이어서,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8).” 내가 알고 모르고, 미련하여 여전히 다른 데 주목하고 있을 때에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 주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놀랍다. 무엇에 그리 마음이 끌리다가도, 이 세상 그 무엇도 지나가는 것일 뿐이어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허망함에 대해 알게 하신다. 결국 인생은 짧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무엇으로 어찌 한들 하나님 앞에서 내 스스로 의로울 수 있을까?
토요일 오후, 아이가 퇴근을 하고 왔다. 월급을 탔다며 우쭐하여 짬뽕을 사주었다. 피로하여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 돋아있었다. 안 힘드니? 할 만하니? 다들 잘해주시니? 하는 나의 질문은 항상 가벼울 따름이다. 아이는 한 번도 누굴 탓하고 무엇을 불평하지 않는다. 천성이 착한 아이다. 다들 잘해준다고만 하고 힘들지 않다고만 한다. 할 수 있는 일에 감사를 찾을 뿐이다. 모처럼 껄껄거리며 웃었다. 신기하지? 아이와 같이 있으면 즐겁다.
뭔 소릴 하는지, 또는 그 의식의 흐름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때도 나는 이제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건 아이의 마음이다. 그 안에 주를 바라고 주신 데 따른 수고와 애씀을 감사할 줄 안다.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성경공부를 하고, 두어 구절의 말씀을 필사하고, 탁구를 치고 돌아갔다. 뭘 더 어떻게 하려기보다 그렇듯 보내시고 함께 하게 하시는 시간을 즐거워할 따름이라. 며칠 의기소침해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이가 나의 스승이다. 무엇을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것 같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우리는 자라야 한다. 스물세 살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아직 어려서’ 부족한 게 너무 많다는 표현을 쓴다. 그 말에 쉰세 살 나 역시 아직 어려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다고 응수한다. 우리는 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기에 서로 하나가 되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온전하여야 하기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아이가 글방에 오고 우리가 서로 만나 말씀을 나누고 한 주간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유익하였다. 이런저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아이의 사모함이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전에 같으면 성가시고 부끄러웠을 텐데. 아이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할 때 하필 주인 사장의 아이엄마가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짧은 순간, 녀석도 당황스러워서인지 괜한 말을 자꾸 했고 아이엄마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낯선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느낌들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정도로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나 혼자 생각이 많았던 것인지도. 다만 녀석은 당황하면 오히려 말이 늘고 뭐라도 해야 할 것처럼 군다. 그런 모습에 아이엄마도 뭔가 이상하다 느끼면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거나. 우리는 낯섦을 당혹스러워하면서 유난히 엘리베이터는 더디고 느리게 올라왔다.
저도 믿는 사람이라. 굳이 덧붙일 말도 없었지만 그 짧은 상황에도 많은 의미가 담기는 것을 느꼈다. 이 모두는 주의 것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곧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는 것,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8:78).”
우리가 어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짧은 순간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까닭은 오히려 내가 아이엄마를 의식해서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행동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다. 우리 글방이 교회라는 것. 나란 사람은 보잘것없으나 목사라는 것. 이 모두는 주가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 어떤 확신, 또는 자부심 같은. 그 짧은 멋쩍었던 순간에도 나는 주께서 무얼 행하시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복음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려는 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집중하게 하신다. 내 아무리 훌륭하여 천만인을 전도했다 한들. 그래서 나는 바울 사도의 진솔한 고백을 가슴에 새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복음이 아무리 좋고 좋아 구원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해도 그 기쁨에 내가 없다면,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솔직히 나는 누구의 구원을 두고 애태워 절절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나를 돌아보는 일인데, 오늘 시편은 그렇게 시작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그러니까 내가 저 아이의 영혼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같지만 정작은 나를 위하심을 안다. 내가 저이의 관심과 아이의 난해한 행동을 그 짧은 순간에 신경 쓰는 까닭은 그것으로 주님이 내게 일으키시는 마음이었다.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정작은 날 위한 것임을 알고 난 뒤, 마치 내가 무얼 누구 때문에 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즉 나의 토요일 하루가 저 아이 하나 때문에 희생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날 위해 저를 두셨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나를 목사로 세우신 게 그저 다만 긍휼하심 때문이다. 내가 지금 나로 세우심을 받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상상은 차마 서술하기도 싫다. 곧 나는 누굴 위해 세우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다. 다만 주의 은혜라. 나 같은 걸! 전혀 쓸모없는 나로 오늘 이처럼 쓰임을 받게 하시는 게, 궁극적으로는 저 아이가 날 위해 온다. 이 모든 사건과 여건과 모든 환경이 날 위해 조성 된다.
곧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나의 짧은 언어로는 어찌 표현할 길이 없는 기이함이라.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왜? 왜 나 같은 걸? 하는 우문은 현답을 얻게 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 고로 내가 주밖에 달리 알아야 할 것도 의지해야 할 것도 없음에 대하여. 횡설수설 아이와의 난해한 대화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곤 하는 것이다.
가령 아이가 식사 기도를 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이 좋은 거라. 뭐가 어째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앞에 말한 뭐가 어째서는 전혀 중요한 대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아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그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너머 아이의 중심이면 족한 것이었다. 곧 나의 오늘이, 이 어줍은 사역이 목회가 뭐라 표현할 길조차 없는 하찮음이, 정작 그 내용은 별 거 아니라 해도 나의 중심에 들어와 계신 주의 좌정하심이 귀하였다.
아이의 그 중심이 내 것과 하나였나? 주인 사장 부인의 잠깐 머뭇거리듯 이상하게 보는 어떤 시선이나 느낌이 도리어 주 앞에서는 삐쭉, 입을 모으며 웃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내가 어떠하든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었다. 혼자라고 여겨 마음이 몹시 외롭고 우울할 때도 그 우울함으로 주는 더욱 선명하시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6).”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이제 잘 안다. 저 아이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다 알아듣겠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7).” 정말이지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 무슨 일 때문에 아이와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다보면, 하나님의 웃음이란 희락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도저히 나의 이성과 상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주가 함께 하심일 뿐이다.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8).”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7).” 아이가 돌아가고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봄날이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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