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8:5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143:2
누가 덜하고 더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나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알지만 똑같은 사람이라 별 수 없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우리를 세상 사람들보다는 좀 나은 삶을 살라고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저들보다 나으니 이제 좀 낫다는 식의 이해로는 곤란하다. 우리는 주의 규례와 법도를 지킬 뿐이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어서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킬 수 없다는 데 절망한다.
그러므로 지키지 않는 이에 비해 좀 낫다는 식으로 안도하고 위로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린 저들과 다르지 않다. 문란하고 더럽혀진 영혼을 마주하면 할수록 거기서 오히려 스스로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두고 주 앞에서 우린 손수무책이라. 주여 나를 심판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주의 긍휼하심밖에 구할 것이 없다.
이는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신 이유이고 목적이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레 18:3).”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은 성경적인 이해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4).” 한 가지 법밖에 없다!
'세상이 다 그렇다. 그 나이 땐 다 그런다. 남자들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아량이 아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5).” 오늘 말씀은 엄연하여서 전혀 다른 차원의 요구를 하시는 것이다. ‘내 규례와 법도’ 오직 하나님의 법과 규례로 사는 사람들이다. 한데 세상은 온통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특히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어찌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에 매인 것 같다.
이성애자여서 동성애자보다 나은가?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22).” 이에 근친상간이 만연하고,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6).” 동물과의 교접도 서슴지 않는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23).”
이를 묵인하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한 우린 주 앞에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잃는 것이다. 아이가 여자 화장실에서 ‘도촬’을 하다 걸렸다. 한참 사춘기여서 호기심에 또는 보다 문란함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이를 발각하여 벌을 주어야 할까, 덮어주고 용서를 해야 할까? 상습적이다, 계획적이다 하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어쩌다 그리 지속적인 행위로 이어진 일이고, 이는 상한 영혼의 문제다.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저들의 상한 심령을 보자. 아이의 상한 영혼과 그 부모의 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 대하여 긍휼한 마음으로 접근하자. 하나님은 일련의 사건을 우리가 어찌 처리하기를 원하시는가! 서로에게 나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살피는 것이 그 답이겠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24-25).” 우리는 이를 주께 아뢰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 단지 일처리를 위한 일처리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2).”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쩌면 좋은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주께 의뢰하는 수밖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전 10:8).” 저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게 아니다.
우리의 선처와 용서를 악용한다 해도, 전혀 바뀔 인간들이 아니라 해도. 뭘 해도 우린 우리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존재이다. 다만 지혜의 유익을 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3).” 지혜자는 우리의 수고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이를 법대로 한다고 해서 아이가 그 부모가 또는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가 해결 되겠나?
다만 우린 우리 앞에 두신 오늘의 문제를 주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5:9).” 이 모든 게 주의 함의적인 교훈이다. 우리 안을 마주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2:13).” 우린 다만 주의 성품을 의뢰할 따름이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어떤 일을 두고 이를 처리하는 데 있어, 바울 사도는 먼저 우리의 무장을 가르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성인용 사이트, 포르노의 경로를 정부가 차단하겠다고 하니 어떤 권리를 운운하며 들고 있어났다. 법적으로 이를 규제하는 게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탁상공론이 이어졌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 우리 스스로 무장이 필요하다.
베드로 사도는 보다 직설적으로 일렀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항상 경계하라고 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저들이 믿음의 사역으로 학원을 운영하고 아예 그것을 인수하고 난 뒤 벌어진 일이다. 딱 봐도 사탄이 쥐고 흔들려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3).” 우리가 저들을 어찌할까? 가장 어려운 게 용서다. 용서가 어려워서 내 안을 괴롭히는 게 수치심이고 환멸이다. 당사자인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느낄 수치심을 어찌 다 이해할까! 다만, 그러나 그것까지도! 주의 이름으로, 주의 마음에서, 왜 우리를 여기에 두셨는지. 저 아이의 저런 사건을 맡기셨는지. 나는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결국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우리의 구원이다. 나의 영혼이다. 저 상한 심령을 마주하며 주께 아뢰는 오늘 우리의 책무다. 우리가 주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3).”
오늘 시편은 그래서 우리 기도의 방향을 제시한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6).” 그러므로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하시려고. 더는 어쩔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완악함과 난리와 난리, 이 소문을 어찌 견딜 수가 없어서!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7).”
그리하여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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