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별하였음이니라

전봉석 2019. 3. 2. 06:52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위기 20:26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편 145:18

 

 

평소처럼 움직였다. 시간을 따라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청소할 시간에 청소하고 설교 원고를 작성해야 하는 시간에 글을 썼다. 조금은 느슨해질 수 있는 날이면 일부러 더 시간을 따라 행했다. 미세먼지로 대기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자전거를 꺼내놓고 타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내가 이해하는 거룩이란, 그렇듯 주어진 날에 충실한 것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올림픽에 나갈 선수를 그리 여겼다고 한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0:26).” 오늘 말씀은 이를 다시 상기시킨다. 나는 주의 소유라는 것. 이 시간과 내게 더하신 육신과 마음과 이런저런 환경과 모든 여건도 주의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몸이 아파도, 무슨 일이 터졌어도, 무료하고 외로운 날이어도,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말이다.

 

안도하다는 말, 이전까지 불안해하던 마음에서 놓여나는 일인데 자기가 사는 땅에서 평안히 사는 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불안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도 나는 이제 그런 나까지 그러려니 한다. 그것까지도 그리 두시는 이의 것이겠으니, 철저하게 내가 내 것이 아닐 때 누릴 수 있는 평안함이었다. 인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놓아두면 그뿐이다.

 

너무 좋아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는, 그럴 수 있는 게 다른 목적이 있을 때이다. 올림픽에서 출전하는 선수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쉬워진다. 한 선수가 코치에게 구타를 당하고 심지어는 성폭력까지 당했다. 일련의 기사를 보며 그런데도 저를 참고 견딜 수 있게 한 힘을 생각하였다. 그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것을 고대에는 거룩이라고 하였다니, 그 의미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가족도, 친구도, 일반의 모든 경우와 저들의 일상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너무 좋지도 너무 싫지도 않은 무엇일 뿐인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바울 사도의 고백이 새롭게 들린다. 하물며 이 땅에서의 영광을 위해,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모든 것을 접어두는 삶인데.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이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는 말씀을 입에 오래 머금어본다. 허튼 생각이 일어 오히려 더 일찍 서둘러 글방에 나가 평소 금요일에 하던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옆 사무실에 에어컨 설치를 하여서 쿵쾅거리는 소음과 함께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두 인부에게 커피를 타다주며 그쪽 창문을 열고 문을 좀 닫자고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이와 같은 일에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하기는 송구하다. 그런데 그러는 것으로 이미 싸움이겠구나, 생각이 된다. 정작 주인은 나오지도 않은 사무실에서 왜 내가 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히려 커피를 내다주기까지 해야 할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것으로, ‘고작어찌 선한 싸움이라 할 수 있을까만! 그렇게 주를 바라는 일. 때론 참고 때론 견디는데, 그 참고 견딤이 그렇듯 또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는 일상이 되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이처럼 일상적이다. 뭔가 대단한 능력의 불꽃이 팍팍 튀는 삶이 아니다. 뜨거움이 날마다 지속된다면 어찌 일상을 살까? 더러는 무덤덤하니 주어진 날의 주인 되시는 이를 묵상하며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수행하는 일상이 곧 내주하심이었다. 실은 그리 여겨서 부러 그러는 생활도 아니다. ‘습관을 좇아그리 행하여지는 일상이 나로 하여금 주 앞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나의 그런 저런 생각은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의 저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목회 현장에서 또는 말씀과 씨름하면서 얻은 것이다. 나는 기꺼이 저들의 아류다. 그것으로 족하다. 저들은 바울을 베드로는 요한 사도를 묵상하였고 그 가치와 기준을 말씀으로 초점을 맞추었고, 사도들은 그 기준이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이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그러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6).”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리가 얼마나 진귀하고 오묘한지. 묵상하고 있으면 남은 나의 모든 게 중요한 게 없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다시 말하면 요즘 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을 읽고 저가 붙들고 의지하고 따르려 했던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해 관심을 둔다. 그 사도들은 온통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모든 게 주요한 여부를 떠나 그것까지도 주의 것이다. 장래 일의 그림자이다. 물론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좀 더 그리스도인임을 의식하며 선을 도모하고 친절을 베푸는 삶이 유익한 것이나, 그것 또한 전부가 아니다.

 

실제 그것에 너무 의미를 두어 정작 왜 그래야 하는지, 본질은 사라지고 자기 위상과 보람과 남들의 이목에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말씀은 이를 경계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145:18).” 나의 간구가 어느새 주를 위한 간구로 나아간다. 내가 건강하고, 이 일이 좀 잘 풀리고, 저 난제에서 놓여나기를 바라는 까닭은 오로지 주의 긍휼하심뿐이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5).” 이를 삶 가운데 누리고 확장하는 일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는 삶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수골백번을 또 똑같은 일로 실의에 빠지고 우울해 하고 불안해서 안정제를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까지도! 그리 두시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묵상하는 데 유익을 더한다. 그러니까 이를 어찌 표현할지 모르겠으나. 가령 점점 걷는 게 힘들다. 조금 먼 길도 아닌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끌린다.

 

금세 의기소침해지고 짜증도 인다. 파스를 붙이고 참다못해 진통제도 먹는다. 지팡이를 짚고 점점 더딘 걸음으로 보폭의 정도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를 어찌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나? 괜찮지 않다. 이제 오십대인데 이게 뭔가 싶어 두렵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연이 구슬프게도 한다. 그래서 괜히 볼멘소리도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입을 꾹 다물고 침묵 속으로 숨는다. 그럼에도,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9).” 이와 같은 공감에 나는 정직한가? 정말로 나는 그럼에도 감사하고 있는가?

 

그럴 수 없어서 더욱 더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란다는 것. 즉 나는 내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없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마다 위선적인 나를 마주하고 누구보다 악하고 추한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부끄러움을 지고 일어서야 하고 송구함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다만 바랄 뿐, 주께서 나를 선대하심으로 내가 긍휼하심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20:8).”

 

그러니까 나를 거룩하게 하는 이는 여호와시다. 내가 거룩해질 수는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결코 나를 거룩하게 하여 거룩해질 수 없다. 그런데 주가 하신다. 나를 구별하신 이가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4).” 내가 더욱 말씀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이유가 된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이 내게는 없다.

 

단순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할뿐이다. 날마다 죽 쑤고 망치고 또 엉망이 된다 해도, 다시 이처럼 아침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는 까닭은 최소한 나의 하루가 나의 이 묵상 글만큼 만이라도 간절함으로 살 수 있기를. 때론 그것이 한나절도 안 돼 소진되어 마음은 또 온통 비운의 주인공처럼 우울하고 불안해하기 일쑤지만, 그것이 나의 평소가 되어 더욱 주를 바랄 수 있으니 감사하다.

 

공휴일도 월요일도 주일도 그저 평소처럼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4).” 그러므로 주께 구하는 것이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143:8).” 그리하여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