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수기 17:8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9:12
만일 기준이 없다면 좌로나 우로나 휩쓸리기 마련이다. 늘 어느 시대에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우리는 결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이다. 곧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7-8).”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아니면 안 돼!’ 하는 마음보다 무서운 것도 없는 것 같다. 굳이 나이어야 하는 것은 주께서 그리 사용하시는 때이고 그러므로 더욱 주 앞에 정결하여야 하는 것일 텐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9-10).” 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개의 증표를 기념하게 하셨다.
오늘 본문은 그 표준으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세우셨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8).” 다들 각자의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길이겠으나 그 표준은 엄연하여서,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만나 항아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주가 어찌 관여하시고 모든 것을 채우시고 인도하시는지를 알게 한다. ‘두 개의 돌판’은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으로 여느 것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늘 내 안에 이는 허물에 대하여 나는 주께 아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9:12).” 의식하고 주의하여 마음을 단속한다고 하지만 ‘숨은 허물’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는 고질적인 악취와 같아서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3).”
월요일은 느슨하였고 평온하였다. 아침에 글방에 올라가 전날 밤에 쓰는 아이의 묵상 글을 읽는데 뭉클하였다. 누구에게 영어를 가르치면 어떨까? 하고 권하였는데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마음이 갸륵하고 기특하였다.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는 주일날 아이들과 성경 공부할 때 함께 세워져가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 것으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하신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또 누구에게 하였더니 감동하여 주일 날 아이들과 같이 고기파티를 하라며 양념돼지갈비 팩을 주문하여 보내겠단다. 여기서는 이것으로 저기서는 저것으로 서로가 뜻을 같이 하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 우리 하나하나는 주의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곧 예수께서도 친히 우리의 모퉁잇돌이 되시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이러는 것이 곧 말씀 위에 터 닦고 집을 짓는 것이 아니겠나? 요즘 나의 인사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말씀 붙들고 살자는 것이다. 다른 수 없다. 얼마나 교회를 무시하고 기독교를 흔들어대며 말씀에서 어긋난 자들이 득세하는가. 정치로 사업으로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으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자신의 신념을 종교적 신앙으로 여겨 정치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니, 뭐라 자꾸 해봐야 소용없는 일인 것을 알지만 저의 행보로 인해 자꾸 성령이 욕을 당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다. 모든 게 불법하지 않다고 주장하다 뒤늦게 편목을 하고 속전속결로 목사 자격을 공고히 하는 누구나 그를 지지하는 교계나. 또 누구는 정치의 선두에 서서 저들 오합지졸들과 부화뇌동하여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니. 때론 두려운 것이 그러는 자신들만 모른다. 곁에 지지하고 부추기는 세력들로 인함이다.
그런데 성경의 표준은 아주 선명하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한데 이를 잘 섞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데 오히려 역이용하는 것이니. 거기에 또 이런저런 이익과 명예가 걸린 사람들은 기를 쓰고 그의 곁을 따르는 일일 테니까. 요즘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뉴스가 성경을 더욱 의뢰하게 한다.
그렇듯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우리는 말씀 붙들고 살자. 이보다 명료한 일갈이 또 있을까? 아이의 마음에 생겨난 그와 같은 마음이 어찌 아이의 것이겠나? 이를 전해들은 누가 참지 못하고 주일 날 같이들 모여 고기를 실컷 먹으라며 양념갈비를 쏜다고 하고. 나는 그처럼 되어지는, 지어져가는, 우리 둘이 하나가 되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설 뿐이다.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을 더욱 명확히 하신다. 다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에게 고마워할 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내가 더 고마운 일이었다. 저 아이 하나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지어져 가는 데 있어 촉매제가 되는 것이다. 같이 마음 쓰고 한데 기울여 주의 뜻을 구하는 일이어서, 결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음을 더욱 여실히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일인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아내가 목요일에 올 아이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그러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초등학교 졸업 직전에 전학을 온 것이다. 역으로 핸드폰 중독이 되어서 정신과치료까지 받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부모는 어떠한가? 하고 물었으나 아직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했다. 하긴 우리가 상세히 알고 대비한다고 해서 우리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괜히 ‘이런 아이 하나’를 우리에게 붙이시는 게 아니었다.
좀 더 말을 이어보면 길 하나로 저쪽은 부유한 아이들이 살고 이쪽은 가난한 아이들이 산다. 어쩌다(?) 학교가 그 사이여서 싫든 좋든 함께 다니는데, 여태 저쪽 길 건너 아이가 이쪽으로 공부하러 온 경우는 없다. 얘기를 듣고 문의를 하였다가도 ‘이쪽 동네’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풀에 나가떨어지곤 하였다. 이번에도 어차피 안 올 것이라 여겨 교육비도 올려 불렀다는데, 아내는 그게 또 마음에 걸렸다. 어쩌겠나? 우린 다만 하나님이 어찌 하시려는가, 하고 따라갈 뿐이다. 오다 말면 그만인 거고, 한데 앞서 그 엄마의 구구한 사연이 예사롭지 않아서…. 우린 기도할 뿐이다.
보내시는 이가 또한 능력 주실 것이고 우린 다만 그 능력 가지고 감당할 뿐이다. 심지어 몇 년씩 오는 애들은 우리가 뭘 잘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린 날마다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안 믿는 그 아이와 부모들을 위해,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들에 대해 대신 기도하는 게 우리 일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누누이 다짐한다. 주가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다만 그의 인도하심을 따를 뿐이다. 무슨 이유로 아이가 강제로 전학을 당했는지, 결국 또 도져서 모든 학원을 다 끊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우리에게까지 온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내는 아이엄마에게 우리 교회를 귀띔해주었고 저이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글방에도 보내고 싶다고 했다니까. 이처럼 되어지는 일 가운데서 우리는 주의 뜻을 살필 뿐이다. 누구는 죽어도 글방이 교회여서 싫고 선생이 목사여서 싫다는데, 그런 걸 마음 쓰며 상대할 일은 아닌 것이고. 내가 뭘 알아서 ‘아픈 아이’를 어찌 돌보겠나. 다만 저들의 상한 심령이라. 주께 아뢰고 구하는 게 우리 일이라, 다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뿐이다.
다만 이것이 행여 우리의 신념으로 둔갑하고 자기 고집으로 전락하지 않을까를 염려한다. 행여 내가 하는 줄 알고,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꼴이 가당치 않다. 나여서가 아니라 주님이어서 나 같은 것도 들어서 사용하시는 일이었으니, 복음은 단지 겨자씨 한 알 같은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우리에게 이미 뿌려진 천국이라. 우리 둘이 하나 되어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누군 기껏 문의를 하여 우린 다만 기도로 할 뿐이라는 말에 시큰둥하여 다른 학원으로 아이를 보내기도 하였으니. 가는 걸 뭐라 하겠나, 안 오는 걸 뭐라 하겠나.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심령이 가난한 자로 우리 안에 이미 천국이었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13).” 천국을 가진 자는 더더욱 심령이 상한 자를 기억하게 하시는가보다.
이에 우리의 표준은 말씀이다. 그 기준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 잃어도 그것만은 붙들어야 한다. 요즘 나의 인사고 당부고 다짐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2-4).”
그러므로 우리는 힘이 장사 같이, 또는 신방에 드는 신랑 같이 거침 없을 따름이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5-6).” 왜냐하면 주가 다 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9-10).”
그러므로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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